#1 경기 성남시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49) 사장은 최근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대책 발표를 본 뒤 1억원의 운영 자금을 빌리기 위해 주거래 은행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창구 담당자가 "지원대상 등급(A,B)인 것 같긴 한데 아직 본점에서 정확한 지침이 내려온 게 없어 기다려야 한다"고 거부한 것. 어음 결제를 1주일 앞둔 김사장은 결국 부도를 막기위해 은행 이자의 3배 가까이 주고 사채시장에서 돈을 끌어다 썼다.
#2 국내 한 정유사는 최근 원유를 사는 것 보다 달러를 사는 데 더 큰 힘을 쓰고 있다. 은행들이 수입 결제용 단기 외화 차입(기한부 신용장 또는 유전스)을 거부, 달러 현금이 있어야 원유를 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통상 은행에서 60~90일의 유전스를 발행해주면 이를 갖고 원유를 도입해왔는데 연말을 90일 앞둔 지난달부터는 은행에서 유전스를 전혀 열어주지 않고 있다"며 "이 때문에 원화를 달러로 바꾼 뒤 달러 현금으로 원유를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은행들의 몸 사리기가 자금 경색에 빠진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내 몰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정책이 은행 창구에선 전혀 실행되지 않으면서 A등급 기업들조차도 은행 대출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은행들이 연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기업들의 신용장 요구도 거절하며 무역금융마저 마비되고 있다.
기업들이 가장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대책이 은행 창구에선 전혀 실행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정작 돈을 풀어줘야 할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를 이유로 대출을 꺼리고 있는 것. 지난달초 발표된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용등급 C,D 등급 기업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지원 대상인 A,B 등급 기업들조차도 은행들은 갖가지 구실을 들면서 대출을 미루고 있다.
설혹 지원하더라도 기업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까다로운 조건을 내 세운다. 의류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한모(51) 사장은 당장 급전이 필요해 은행을 찾았다가 기존 대출을 일괄청산하면 신규 대출을 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다. 한 사장은 "빚 갚을 돈이 있으면 왜 돈을 빌리겠느냐"며 "아예 회사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은 기준이 강화된 은행 신규 대출 심사과정에서 신용평가 등급이 더 낮아지며 오히려 원금의 조기 상환 요구까지 받고 있다.
대기업인 국내 정유사의 기한부 신용장 개설도 거의 중단된 상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만 해도 원유 도입은 현금 절반, 유전스 절반의 비중이었는데 최근에는 유전스의 비중이 20%도 안 될 정도로 떨어졌다"며 심각성을 지적했다.
은행들이 정유사의 유전스 요청을 거절, 정유사가 달러 확보에 나서며 원ㆍ달러 환율 상승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4대 정유사가 한달에 도입하는 원유가 7,000만배럴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제 원유가를 배럴당 80달러만 잡아도 적어도 한달에 50억달러 이상의 원유 도입 자금이 필요하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유전스가 어려워질수록 기업들은 달러 구하기와 현금 확보에 나설 수 밖에 없다"며 "이 경우 환율은 더 상승할 수 밖에 없고 유동성 위기는 더 커지는 악순환이 야기되는 만큼 금융권과 산업계가 상생할 대안 마련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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