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사지 이코노미스트의 조사연구소 EIU가 최근 발표한 '2008년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2년 전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에 포함되었던 데 비하면 진일보한 결과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불완전하며, 한국사회는 여전히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그렇게 봐 주니 일단 불행 중 다행이지만 어딘가 편안치 않은 구석이 있다.
턱걸이로 받은 '완전 민주'평가
EIU는 전 세계 165개국과 2개 자치령을 대상으로 선거과정과 다원주의, 정부 기능, 정치 참여, 인권 등 다섯 가지 범주에 걸쳐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평가했다. 한국은 선거과정과 다원주의 9.58점, 정부 기능 7.50점, 정치 참여 7.22점, 정치문화 7.50점, 인권 8.24점을 받아 평균 8.01점으로 28위를 차지했다. 167개 나라 가운데 반 정도가 민주주의국가로 분류되었지만 정작 '완전한 민주주의'는 30개에 불과했다.'완전한 민주주의'의 기준이 지수 8점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은 간신히 턱걸이를 한 셈이다.
이코노미스트 연구소의 평가는 한 언론사의 평가일 뿐이고 방법론 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역에서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민주화 흐름이 확연한 정체현상을 보이고 세계 금융위기와 그로 인한 급격하고 장기화한 경제침체가 일부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진단은 결코 예사로이 소화되지 않는다. 경제위기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우리도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선진국들이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겪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특히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취약한 신흥시장 국가들이 경제위기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결코 안도할 수 없다"는, EIU의 국가예보서비스 책임자 케키치(Laza Kekic)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 크다.
경기후퇴의 강도와 기간, 시장에 대한 태도와 정부의 역할 변화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않은 많은 나라들이 극심한 사회경제적 스트레스에 굴복하여 민주주의의 후퇴를 겪기 쉽다. 특히 정치참여와 정치문화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민주주의 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들이 취약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한 때 경제발전, 특히 국민소득과 중산층 형성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당연시된 적이 있었다. 또 민주화가 경제, 즉 자본주의 발전의 선행조건이자 기여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이제 민주주의의 당위와 현실성에 대한 의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확실히 한국 민주주의는 순항해 온 것인가.
그러나 어디선가 숨이 차다. 헛기침 소리가 커진다. 한 쪽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넘쳐흐르는 듯 보이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정권의 언론장악 논란이 불거지는 현실, 법과 질서를 강조하다가 촛불시위로 국정이 마비되다시피 하는 현실, 사상 유례없는 경제위기를 겪는 와중에도 국정원의 권한 강화를 위한 법 개정, 사이버모독죄 신설을 위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현실, 이 모든 것은 다름아니라 턱걸이를 한 채 헐떡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쁜 숨소리를 전해 준다.
정치 분야의 갈 길이 아직 멀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우리가 갖은 고난을 겪으며 쟁취한 귀중한 가치이지 성과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고약한 적대시 정책의 명분으로 악용해 온 북한과 체제경쟁을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내세울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민주주의'에 턱걸이한 걸로 자기도취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참여와 정치문화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결함 등급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안도하기는 이르다. 성취보다는 해야 할 일이, 걸어온 길보다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 민주주의, 아직은 안녕하지 못하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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