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전'이라는 본명 대신에'이애리수'라는 예명으로 살게 된 것은 그의 운명의 진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녀가 다닌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는 1899년에 주일학교 형식을 빌려 개성여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지만 1910년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정식 개교를 한다.
공교롭게도 호수돈 여학교의 나이는 그와 같다. 자유당 정권 때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박마리아(이기붕 부통령의 부인)씨도 이 학교 출신인데 그보다 4년 선배로 1928년에 모교 선생을 하기도 했다. 1928년은 이애리수가 단성사에서'황성옛터'를 처음 불렀던 바로 그 해다.
모교인 호수돈은 홀스톤(Holston)이란 이름을 우리말 발음으로 옮겨 놓은 것인데 그의 예명인 애리수(愛利秀)도 영어 이름인 앨리스(Alice)를 우리 발음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애리쓰 또는 이애리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명인 이음전(音全)의 가운데'음'자가 '소리 음'이라서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가 떠돈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명인 애리수의 '애'가 '사랑 애'자인 것은 훗날 예사롭지 않은 그의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무렵은 대중예술이 서서히 동트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 극장무대가 활발해졌는데 작곡, 작사를 하던 전수린이나 왕평과 같은 이들도 이 무렵에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다. 그러면서 이름을 예명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나 트렌드가 되다시피 했다. 작곡가 전수린의 본명은'전수남'이고 작사가 왕평의 본명은'이응호'이다.
왕평은 배우와 가수를 겸하기도 했는데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사용했다. 이음전이 이애리수가 된 것도 이런 흐름의 하나였다고 보면 된다. 왕평은 경북 영천이 고향이지만, 전수린과 이애리수는 개성이 고향이다. 특히 전수린은 애리수의 모교인 호수돈 여학교의 미국인 여자 선생한테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음전은 학교생활을 적극적으로 했다. 활달한 성격이었고 줄곧 반장을 하는 등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이러한 개성이 아마도 연극배우나 가수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신여성의 길을 가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을 삶의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배우와 인기가수로서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을 무렵에 그는 친지의 소개로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배동필(裵東必)'큰 키에 잘 생긴 얼굴, 부잣집 외아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서울 종로 내수동 토박이이고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상과 1학년 재학 중이었다. 나이는 애리수보다 2살 아래였다. 큰 키에 예쁘고 인기 높은 신여성 스타 이애리수와 멋쟁이 배동필은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리 쉽게 맺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도 아주 큰 어려움이다. 배동필씨의 아버지 배상호 선생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이유는"양반가문에 배우나 가수출신이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젊은이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배동필은 아버지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야말로 어림도 없었다. 배동필의 누나와 누이동생 까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해 봤지만 배상호 선생의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배상호 선생은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아들을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고 만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사랑 이야기는'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배동필과 이애리수의 사랑은 현해탄을 넘나들며 오히려 더욱 더 뜨거워지게 된다. 사랑이 깊어 갈수록 아버지 배상호 선생의 반대는 더욱 완강해졌다. 결혼은커녕 두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두 젊은이들의 선택은 막다른 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 할 바에야 함께 세상을 떠나자는 것. 더구나 이때는 이름난 사람들의 자살사건이 많아서 사회적인 걱정거리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실제로 이애리수와 같이 빅터레코드사에 전속돼 있던 여자 가수 강석연이 음독자살을 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배씨의 여동생 배동일씨가 급히 병원에 연락을 해서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아버지는 여기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겠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아들과 이음전의 혼인을 승낙한다. 그러나 혼인 승낙에는 매우 엄격한 조건이 뒤따른다.
첫째는 결혼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끝까지 지켜졌다. 배동필씨가 14년 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만 61년 동안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늦게나마 결혼식을 올렸을 만도 한데 이음전 여사는 "약속은 지킨다"면서 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혼인 조건은 지키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다."며느리가 대중 예술인이었다는 얘기를 절대로 발설하지 마라."였다. 당시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아들딸을 낳은 후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레코드 취입 때나 가수 활동 때 찍은 사진 등도 모두 없앴고 연예계 사람이나 언론사 사람들과의 접촉도 일정 금지였다.
매우 지키기 힘든 조건이지만 이음전 여사는 이것도 철저하게 지켜냈다. 장남인 배두영씨가"누나들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생(연세대)이 돼서야 내 어머님이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세 번째 조건은, 일단 며느리가 된 이상 가수고 배우고 모든 것을 잊고 배씨 집안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1934년에 첫딸을 낳고, 이어서 둘째 딸과 큰 아들, 작은 아들 등 2남 7녀, 9남매를 두었다. 9남매의 어머니로서, 그토록 사랑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또한 엄격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녀는 삶의 무게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말없이 살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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