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폐막식을 기억하는가. 마지막에 전설의 록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64ㆍ'레드 제플린'의 리더)가 나타났을 때, 그 이전 3시간 동안의 화려한 불꽃과 집단기예는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미 페이지가 박제된 전설이 되기를 거부하고 시대와 통하기를 원했듯, 예술의 진정한 거장은 당대와 조응한다. 갑년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있으면서, 후배 예술가들과 젊은 기획자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한국의 예인들 역시 그렇다. 인터뷰 '다시, 길을 떠나다'는 그들의 끝나지 않은 꿈을 응시하고자 한다.
연일 만원이었다. 보조석 깔기는 다반사. 양이 질을 보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치열한 생존 논리가 판치는 대학로에서 갑년을 넘긴 연출자의 무대에 젊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이다.
"객석이 모자라 걱정"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배우세상 소극장에서 지난 2일까지 40여일 공연했던 '아름다운 인연'은 흥행의 노 연출가 강영걸(65)씨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작은 무대에 모두 23명의 배우를 동원시키니 안 그래도 꽉 찼던 무대다. 무속을 주제로 한 연극이라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굿거리 장단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사실 이번 연극은 장충체육관에서 거하게(10억원의 예산을 들여) 마당놀이 식으로 펼치려 했던 것인데, 제작비 부족으로 접어야 했다. 그나마 해원은 한 셈이다.
동숭동의 성공은 이제 남산으로 간다. 만원사례의 열기가 채 사그라지기 전,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또 다른 기록을 준비 중이다. 강영걸씨의 몸은 둘이라도 바빴다. 하루 대여섯 시간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노배우들과 씨름이 끝나자마자 무대에 올린 작품의 행방이 궁금해서 곧 대학로 행이었다.
14일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를 '피고지고…'는 그의 낯익은 재공연 목록에서 각별한 위치를 처지한다. 1993년 초연 이래 이 작품 최고의 앙상블로 꼽히는 오영수(65), 김재건(62), 이문수(60)씨 등 국립극단의 노장들과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연습은 이 덧없는 사이버 시대에,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동지의 의미를 일깨운다. 여기에 국립극단이 '우수 레퍼토리 특별공연'이라는 명찰까지 덧대주니 미상불 흥이 날 법도 하다. 그러나 강씨는 지청구가 등등하다.
"대사 전부 끊어지고, 같이 가는 게 하나도 없고…. 내 보기에도 지겨워 죽겠어. 주고 받고가 안 되니, 전혀 안 돼. 더 해보고 자를 거야." 가방 속에 들어있는 대본 뭉치 중 하나를 집어든 그의 주문이 끊일 줄 모른다.
벙거지 눌러쓴 얼굴에서 악마저 비친다. 애숭이 취급 받는 터에 벌컥 성질 한 번 낼 법한데, 관록의 노배우들은 예상했다는 듯 직수굿하게 연출의 말을 따라준다.
그의 호통에 요술처럼, 4ㆍ4조 대사의 맛이 살아난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위해 앙버티던 혈기를 뒤로 한 지금, 속시원히 내질러주는 동년배의 연출가가 있다는 사실이 노배우들에게는 위안이다. 의상 담당 등 스태프들은 그의 부름을 받고는, 왕년의 저 강영걸이 본격 운신을 시작한 것을 알고는, 일정을 제쳐두고 모였다.
1980~90년대 연극판은 그가 '접수했다' 해도 좋았다. '넌센스(Nunsense)' '불 좀 꺼주세요'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하늘천따지'와 거리굿 등 한꺼번에 5개 작품이 그의 이름을 달고 올라갈 때도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연극연출상 등은 '강영걸표 연극'의 흥행성과 작품성을 공증해 주었다.
"극의 목적이란 거울을 들어 자연을 비추는 일, 그 시절 그 시대의 양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일세." 햄릿이 부친의 죽음을 파헤칠 연극을 준비하며 배우와 나눈 말(3막 2장)은 곧 강씨의 연극관이기도 하다. 그에게 연극 무대란 무엇보다 살아있는 언어의 향연이다. 가장 공 들이는 대목은 당연히 배우의 화법이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도, 몰리에르도 건너뛴 채 넌버벌, 크로스오버 운운하는 넌센스가 벌어지는 형국이죠. 현대 서울 사람들이 쓰는 일상어가 가장 훌륭한 연극 언어예요." 그의 언어 리얼리즘 앞에서는 브로드웨이 버전의 '연극적 방식'이 객쩍다.
세계의 언어가 된 사물놀이를 발견한 것은 일례다. "1978년 박범훈씨 등과 타악기만으로 이뤄진 공연물을 만들자며 의기투합, 당시 공간사랑 극장장이었던 내가 강준혁 심우성씨 등을 규합해 올린 '정통 음악의 밤'이 출발이었죠."
이광수, 최종실, 김덕수 등과 호형호제하며 재즈ㆍ클래식과 접목한 '울타리굿'으로 새로운 전통의 탄생을 알렸다. 요즘말로 그는 코디네이터였다.
그러나 그의 치아는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인가. 한창 시절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아 홧김에 뽑아버린 앞니만이 아니다. 골몰하면 이빨을 쥐고 흔드는 버릇에 무려 9개의 이빨이 나갔다. 이제 더 못 견딘다.
"연말쯤 틀니로 모두 바꿀 거예요." 스스로에게 베푸는, 때늦은 사치다. 2005년 암으로 식도 등을 절제, 그 좋아하던 술도 완전히 끊은 지 1년이지만 이빨 사정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다.
구멍은 그의 삶에도 있다. 내상은 더 크다.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고, 내 것만 신경 쓰니 이런 이기주의자도 없었어요." 그의 부인은 연극에 홀린 남편과 결국 5년 전 헤어지고 말았다. "너무 고생만 시켰지."
살아서 영원이 된다는 말은 그에게는 현실이다. 연극으로는 유일하게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봉인된 그의 1991년도판 '불 좀 꺼주세요'는 후세와 그를 잇는 끈이 될 것이다.
"연극은 마라톤이에요. 언젠가는 꽃피는, 깨달음의 종교예요."
■ 내가 꼽는 나의 대표작/"이만희 작가 희곡 '그것은 목탁… '이 전환점"
강영걸씨는 자신의 3대작으로 '불 좀 꺼주세요' '피고지고 피고지고'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를 꼽았다. "형식미의 실험, 리얼리즘의 탐구, 메시지 전달 등으로 나름의 미학적 과제를 안겼던 작품이죠." 모두 이만희 작가의 작품이다.
1990년 공연작 '그것은…'은 일대 전기를 이뤘다. 이만희 작가와 가졌던 첫 작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7개월 동안 준비, 백상예술대상과 서울연극제 등 연극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도 전환점이었다.
"그 전까지는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돼 일체 인터뷰를 거절했는데, 큰 상을 둘씩 받고 보자 제 작품에 책임을 지자는 생각으로 바뀌었거든요." 그 무대 직후인 1990년대 초반 그의 연출력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다시피 했다.
"배우들이 관객과 함께 늙어가야 해요. 서로 형기왕성할 때는 소 닭 보듯 하다, 이제는 친구가 됐어요." 불꽃처럼 에너지가 튀다 보니 연기력과 연출력을 서로 밀어붙이던 시절은 갔다. "극중 인물과 배역 배우가 함께 늙어가는 연극은 이번 게 처음이군요."
■ 강영걸을 말하다/ "작업방식 엄격해 마음 단단히 먹고 모셨죠"
"공간사랑 시절부터 선생님의 스타일을 좋아했어요. 10년 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연기 지도를 해 주신 인연을 믿고 8월에 전화 드렸죠."
'아름다운 인연'에서 입심 좋은 삼신할매로 등장하는 현금숙(51)씨는 강씨를 끌어들인 주역이다. "8년 쉬다(살림만 하다) 덤비는 무대예요." 강씨의 엄격한 작업방식을 익히 아는 터라, 그는 마음 단단히 먹고 덤볐고 판에 모셨다. 맏언니로서 극단 배우세상 운영도 맡고 있는 현씨는 "화술에 소홀하기 일쑤인 젊은 단원들 교육까지 부탁했다"고 한다. "정신 교육은 어른에게 맡겨야 제격이거든요."
"지금 대학로는 편법이 판치는 도떼기시장이에요. 연극정신은 철 지난 바닷가 신세예요." 이 대목서는 비감하기까지 하다. "진짜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넋 빠진 아이들 없는 곳으로 오려면 이곳으로 오라고."
극단 대표 김갑수씨의 부인이기도 한 그는 "내년 상반기는 모두 강 선생님께 맡길 것"이라며 강한 기대를 나타냈다. "이만희의 '돌아서서 떠나라'로 그 본격 출발을 알릴 거예요." '아름다운 거리(距離)' '피고지고' 등 강영걸ㆍ이만희 버디로부터 탄생한 무대가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재탄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무대는 잠시 뜸 들였다가 12월 이후 장기공연 체제에 돌입, 버전업 해 가며 적어도 내년 2월까지는 이어갈 생각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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