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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은 지난해 9월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가자 즉각 대법관 출신 변호사 S씨를 선임했다. 항소심에서 재판장과 대학 및 연수원 동기 변호사를 변호인단에 포함시켰던 현대가 상고심까지 대법관 출신을 변호사로 내세우자 법조계 주변에서는 당장 "전관예우를 노린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올해 2월에는 "상대방이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대법원에서 사건이 파기됐다"며 대법관 출신 변호사와 주심 대법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제기돼 법조계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해당 사건에서 대법관 출신 변호사와 고교 및 대학 선후배 사이이고, 3년 넘게 대법관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당시 주심 대법관은 "판결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대법원의 상고심에서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야 유리하다는 게 법조계의 '속설'이다. 그러나 본보가 대법관들의 수임 사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고심에서 '전관예우'를 단순한 속설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적지 않았다.
우선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 가운데 대법원에서 하급심 판결이 뒤집힌 사건을 분석했다. 2005년 이후 퇴임한 대법관 출신 변호사 7명이 2006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맡은 대법원 민사사건은 총 225건. 이 가운데 대법원에서 하급심이 파기된 것은 34건으로, 79%인 27건이 대법관 출신 변호사의 의뢰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뒤집혔다.
S 전 대법관의 경우 2007년 이후 대법원 민사사건에서 3건의 파기환송과 2건의 파기자판(하급심 파기 후 대법원 스스로 판결하는 것) 선고를 받았는데, 5건 모두 승소였다. Y 전 대법관은 13건의 파기환송 사건 중에 9건에서 승소했고, K 전 대법권은 7건의 파기환송ㆍ파기자판 선고를 받았는데 6건을 승소했다.
P 전 대법관은 8건 중 6건 승소였다. 대법관 출신이 변호를 맡아 항소심에서 의뢰인이 패소한 사건을 대법원에서 뒤집은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해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는 경우도 다른 사건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심리불속행 기각'이란 민사사건이 급증해 대법원이 모두 소화를 할 수 없게 되자 법리관계에 분쟁이 없고 사실관계에만 분쟁이 있는 사건들은 심리를 하지 않고 바로 기각하는 것을 뜻한다. Y 전 대법관은 자신이 맡은 55건의 대법원 민사 사건 중 10건에 대해서만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받았다.
S 전 대법관은 45건의 민사사건 중 15건이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맡으면 최소한 대법원에서 자세히 사건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을 최종적으로는 주심 대법관이 하지만, 어떤 사건을 걸러낼 것인지는 실질적으로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들이 결정하고 있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서울변호사회 관계자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건을 연구관들이 쉽게 심리불속행 기각을 할 수 있겠느냐"며 "여기서부터 전관예우 논란이 출발한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대 교수는 "대법원은 전관예우의 출발지로서, 전임 대법관들의 낯뜨거운 변호사 활동이 사법 불신의 시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법관을 지낸 것을 영예로 알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로 돌려주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다른 보완책을 마련해서라도 전직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을 막는 것이 국민적 피해를 막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권지윤 기자 legend8169@hk.co.kr
■ 산더미 사건들이 '전관예우' 키운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모두 2만7,017건.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의 대법관이 1인당 연간 2,000여건을 처리한 셈이다. 대법관이 모든 사건기록을 일일이 검토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전관예우' 의 토양이 된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이에 따라 대법원에 몰리는 사건 수를 줄이기 위한 구조적 수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고법 상고부 설치' 논의가 대표적이다.
2006년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전국 5개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둬 소송가액이 일정액 이하이거나 경미한 사건의 상고심을 처리하자는 법률안을 마련, 17대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 논의과정에서 이견이 맞서다가 자동 폐기됐다. 법조계에선 상고부 설치를 18대 국회에서 재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많다. 대법원 구조 개혁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고, 법조계가 고루 참여한 사개추위에서 오랜 논의 끝에 도출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9년간 운영됐던 '상고허가제'를 부활시키자는 견해도 있다. 상고허가제는 상고사건에 대해 대법관 1인이 사전 검토를 통해 대법원에서의 심리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그러나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으로 폐지된 바 있어 재도입은 어려울 전망이다.
대법관 증원도 하나의 방편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대법관을 몇 명 늘리는 것으로는 큰 실효성이 없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데다, 대법관 증원에 대한 반대여론과 대법원의 위상 저하 등의 문제점이 있어 이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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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관예우' 막을 방안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 대한 전관예우를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여러 방안이 제시됐지만 이해 당사자들의 이견으로 아직까지 속 시원한 해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우선 법무부가 제시한 '고위직 출신 변호사 최종근무지 사건 수임 제한 법안'. 지난해 8월 추진된 바 있는 이 법안은 차관급(고법부장판사ㆍ검사장) 이상의 고위직 판검사는 퇴직 후 일정기간(1~2년) 최종근무지에서 재판 또는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의 수임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법무부는 직업선택의 자유와 평등권 침해 등의 이유로 1989년 위헌 결정이 났던 구 변호사법(전관 변호사의 개업지 제한)을 감안해 제한 범위를 고위직으로 한정, 제한 기간ㆍ사건 등이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로 조정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하자 무산됐다.
퇴임 대법관에게 변호사 개업 대신 명예로운 은퇴의 길을 보장키 위해 미국의 '시니어 법관(senior judge)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다. 자격을 갖춘 판사가 은퇴 후 변호사가 되지 않고 '시니어 재판관'을 선택하면 일정 정도의 재판을 맡기고 경제적으로 현직과 동일한 대우를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종신법관제도가 전제되어야 하는 점에서 한국의 상황과 다소 거리가 있고 사법부의 지나친 보수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퇴직 대법관 공익법인 활동 지원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변호사 개업을 지양하는 대신 퇴직 대법관에게 공익적 법률자문이나 교육ㆍ강연 등 비영리 활동을 장려하고 국가가 일정 부분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적 규제보다 대법관 스스로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김갑배 변호사(전 대한변협 법제이사)는 "대법관은 법관으로서 최고 자리인 만큼 퇴직 후 영리활동을 하기보다는 학계로 진출해 연구활동을 하거나 공익활동을 통해 명예를 지켜나가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전관예우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후배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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