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열매를 다 내어준 뒤 빈털터리가 되어 말라가는 들깻단과 늙은 아버지가 한 장면에 겹쳤다.
들깻단은 추수가 끝난 빈 밭에 버려져 있고, 아버지는 혼자서 기침 소리에 깨어 새벽잠을 설치고 있다. 늦가을을 맞은 들깻단도 아버지도 이제는 거죽만 남은 쭉정이 신세다.
하지만 잘 마른 들깻단엔 깨를 털기 전의 향기와는 또 다른 향기가 있다. 물기가 싹 가신 뒤의 들깨는 빈 몸에 서리를 맞아들여 고소한 열매들이 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체취를 뿜어낸다. '반짝이는 들깻내', 몸과 마음을 비워나가는 그 맑고 가볍고 정갈한 몇 말의 냄새야말로 인생의 참된 반짝임이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란 곧 노년을 늙고 병듦이 아닌 자연스런 완성으로 받아들여 인생이 인생다워지는 순간을 가리킨다.
가을 들판이 여윈다. 덤불의 기운이 꺾이면서 숲에 가려져 있던 작은 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빽빽하게 붙어 있던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도 여백이 늘고 있다. '다 털린' 저 빈 곳에 빨래라도 내다 걸듯 비린 습기들을 조금씩 말려볼 일이다. 바싹하게 잘 마른 들깻단은 불에 탈 때도 매운 연기를 내지 않고 불땀이 좋은 법이므로.
손택수ㆍ시인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