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의 두 배는 족히 넘을 정도로 쌀 포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들이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경북 청도 서청도농협 미곡종합처리장에 들어선다. 초조한 기색으로 쌀 등급 판정을 기다리던 농민은 특등급 이라는 말에 잠시 안도하다 이내 시무룩해진다.
"농사가 잘 되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하네. 돈이 되어야지. 인건비도 나오지 않고 빚만 느는데 뭐가 좋다고.. 비료 값만 해도 9,700원 하던 것이 올해는 2만원이 넘는데 …" 기자의 질문에 김경추(66)씨는 긴 한숨만큼이나 깊게 패이고 갈라진 주름 가득한 손마디로 손사래를 친다.
출하가 한창이어야 할 전남 나주의 배 농장에선 바삐 움직여야 할 인부들의 목소리대신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자식 같이 키운 것들을 양이 많다고 갈아엎다니. 내 30년 배를 키웠는데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은 본 적이 없소"
수확이 막 끝난 상품의 배들이 거대한 트랙터 바퀴와 날카로운 로터리 칼날 아래에서 무참히 뭉개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농장주 박희심(73) 할머니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자리를 뜬다.
농림부가 올해 생산량 증가로 가격이 폭락한 배의 수급을 조절하기 위해 전국서 1만 톤의 배를 산지폐기하고 있다. 폐기 가격은 18Kg 기준으로 정부와 지자체 보조금 포함해 9,000원 정도, 1Kg에 500원 하는 꼴이다.
예년 같으면 15Kg 한 상자에 5만원 이상 하던 것이 현재 시세가 1만~1만5,000원으로 인건비도 건질 수 없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전북 익산 팔봉면 고구마 수확 현장에서 만난 남궁기영(44)씨는 "6년 전 농사에 큰 뜻을 품고 도시에 살다 귀농했지만 이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학원도 보내지 못하는 처지"라며 아이들 생각에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전남 나주시청 앞에 40Kg 쌀 5,000 포대가 쌓였다. 수매를 하기 위해 내온 것이 아니라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수매를 거부하는 농민들의 항의였다. 올해 정부 제시 수매가는 5만50원(저가미 포함 평균)이다.
하지만 유류가 상승(전년대비 85%)과 비료값 상승(112%)으로 쌀 생산비가 전년보다 15% 가량 상승했다. 생산원가가 도정하기 전 40Kg 조곡을 기준으로 6만9,593원으로 오히려 2만원가량 적자라는 설명이다. 농촌 들판이 아닌 시청 앞 아스팔트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농민들의 한탄은 끝이 없다.
태풍의 피해도 없고 일조량도 좋았던 올해 대부분의 농촌은 풍년을 맞았다. 하지만 풍년가가 울려 퍼져야 할 황금들녘엔 농민들의 긴 한숨이 대신하고 있다. 풍년으로 수확량은 늘었지만 외국 농산물의 수입 증가와 경기침체로 수요가 준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여기에 고질적으로 복잡한 유통과정은 산지의 가격과 소비자 가격 차이를 더 크게 만들고 있다.
갈수록 악화되는 농촌의 경제 현실과 고령화는 농업인구마저 계속 줄게 하고 있다. 농림부 농림업무주요통계에 따르면 1989년 수입자유화조치 이후 90년엔 660만 명이던 농가인구가 93년엔 540만 명으로, 올해엔 320만 명으로 급격하게 줄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이창한 정책위원장은 "기상이변과 식물성연료 생산 증가 등으로 국제 곡물 가격은 계속 폭등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촌 붕괴현상을 방치한다면 결국 식량 주권을 내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도 흉작이 들었던 1972년과 1980년에 1톤에 200달러 하던 쌀을 661달러와 550달러에 들여 온 일이 있다.
전북농민회 김영제(43) 사무처장은 "논농사에만 국한된 쌀직불제로는 안 된다. 유럽과 같이 환경, 문화, 식량 생산이라는 농토의 다원적 기능을 인정하고 밭 작물 전체에 대한 보조금을 강화해 농토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과 같은 지산지소(지역에서 난 산물을 지역에서 소비) 운동을 지자체들이 좀 더 확대하고 유통단계를 개인 보다 작목반 마을단위로 최소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부가 적극적 지원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한다.
글·사진=김주성 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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