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9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피는 동맹보다 진하다"고 말했다. 동맹관계보다는 민족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의지는 한 달 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의 북송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YS의 민족 우선 노선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 막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북측에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여버린 것이다. 그 후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은 초강경으로 돌아서 협상과 압박을 병행하던 미국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정도였다.
■ YS의 대북정책 선회 배경에는 핵 문제 외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바로 북측의 격렬한 YS비난이다. 풍선에 실어 남쪽에 뿌린 삐라, 당 선전기구와 관영매체 등을 통해 쏟아낸 비방은 일일이 옮기기 거북할 정도다. 정치매춘부, 정치간상배, 정치협잡배, 사대매국노, 전쟁광신자, 민족 반역자, 문민역도, 문민괴수…. 나름대로 통일운동에 앞장섰다고 자부한 YS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만도 했고, 실제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YS비방은 카터 전 미 대통령의 중재를 통해 1994년 7월로 남북정상회담 일정이 잡힌 상태에서도 계속돼 예비 접촉의 주요 논란거리가 됐다.
■ 전두환ㆍ노태우 대통령 시절은 더 했다. 파쇼도당, 괴뢰도당 같은 표현은 기본이었고 부정부패 왕초, 역도(逆徒), 협잡배 앞에 극악한 수식어를 붙여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2000년 6ㆍ15 이전까지는 파쇼광신자, 괴뢰통치배, 남조선 집권배 등의 비방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기간에는 '남조선 집권자' 등의 순화된 표현을 썼고 직접적인 비방 표현은 없었다. 북측 언론매체에서 남측 대통령 비방이 재개된 것은 올해 4월1일자 노동신문부터. 문민정부 이후 10년 만에 역도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 이를 신호탄으로 북측의 각 매체들은 협잡꾼, 매국노, 정치몽유병환자, 알짜무식쟁이 등의 극렬 표현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비난 횟수가 월 80~130여 건에 이른다. 이 대통령이 어느 수준까지 보고를 받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욕설을 듣고 기분 좋을 통치자는 없다. 북측도 남측의 반북단체들이 날려보내는 김정일 위원장 비난 삐라로 속을 끓이고 있고, 중단하지 않으면 남북관계를 전면 차단하겠다고 으름장이다. 북측이 삐라살포 중단과 남북관계 복원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관영매체를 통한 남측 대통령 비방부터 중단해야 한다. 물론 남측 민간단체들도 자제가 필요하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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