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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미국/ 韓美 정상 성향따라 긴장과 친밀사이 '16년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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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미국/ 韓美 정상 성향따라 긴장과 친밀사이 '16년 줄타기'

입력
2008.11.10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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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는 양국 정상의 성향에 따라 긴장과 밀월 사이에서 요동쳐왔다. 특히 1993년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 정상 간 정서적 친밀감은 한미관계의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진보성향의 버락 오바마 당선자와 보수성향의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궁합을 보일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YS-클린턴, 불협화음

김영삼 전 대통령은 93년 2월 취임사에서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이라고 선언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경악했다. YS는 3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가 바로 다음 달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자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며 태도를 바꿨다. YS는 특히 11월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양국간 실무차원에서 조율이 끝난 대북 포괄적 접근방안에 동의할 수 없다며 합의를 뒤집는 '몽니'를 부리기도 했다.

이후 클린턴은 YS와 등을 돌렸다. 94년 6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 병력을 증강했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YS는 "미국이 우리 땅에서 전쟁하려는 것이냐"며 클린턴에 강력 항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기도 했다.

이어 미국은 10월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하는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냈지만 이번에도 뒤통수를 맞은 YS는 "무슨 동맹이 이러냐"고 따지는데 그쳐야 했다. 결국 한국은 경수로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북핵 문제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지원요청을 미국이 외면한 데도 클린턴의 불편한 감정이 일부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DJ-클린턴, 밀월관계

98년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집권 2기를 시작한 클린턴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8월 북한의 미사일 문제가 불거지자 클린턴은 페리 전 국방장관을 북한에 보내 이듬해 대북 포용정책을 기조로 한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했다. 이는 DJ와의 조율을 거쳐 햇볕정책을 대부분 받아들인 결과였다.

99년 정상회담에서 클린턴은 DJ의 햇볕정책 설명을 듣고 "대북정책에 관해 난 조수석에 앉을 테니 당신이 운전석에 앉아달라"며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 DJ는 "임기가 끝나도 친구로 생각하겠다"며 각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한국의 외교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와 2000년 6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장례식 때 DJ는 다른 국가의 정상과 달리 클린턴과 동일한 예우를 받았다.

DJ-부시, 어긋난 관계

2001년 일방주의자인 부시 대통령의 등장으로 한미관계는 다시 삐걱거렸다. 2월 양국 정상간 첫 전화통화에서 DJ가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고 얘기를 꺼내자 부시는 전화기를 손으로 막고 주위를 돌아보며 "이 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ïve he is)"라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했다.

3월 한러 정상회담서 DJ가 푸틴에게 미국이 폐기를 주장하던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조약을 '전략적 안정의 시금석'으로 평가하자 부시 행정부는 불쾌감을 토로했다. 이어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가 DJ를 'this man(이 사람)'으로 소개하고,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는 'skepticism(회의적)'이라고 평가하는 등 두 정상은 냉랭한 관계를 지속했다.

노무현-부시, 각자의 길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유세에서 "반미면 어떠냐. 미국에 한번 안가도 대통령 될 수 있다"며 미국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민족, 자주를 외치는 노 대통령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는 당초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가 노 대통령을 'easy man(편한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서도 당시 청와대 참모진은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2007년 9월 한미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는 노 대통령이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부시의 답변을 재촉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냉랭해지기도 했다. 뒤늦게 통역의 매끄럽지 못한 진행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양국 관계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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