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따라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
생을 다한 뒤 산길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호랑나비의 사체가 개미를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호랑나비돛배!’. 나비도감에도 돛배도감에도 없는 이 전혀 새로운 사물의 탄생은 우리를 얼마나 경이롭게 하는가.
죽은 호랑나비와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이고 가는 개미의 힘든 노역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연민에 가득차 있다. 저 무거운 육신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는 없을까. 이런 간절함이 날 수 없는 나비의 ‘날개’를 일순간 ‘돛’으로 바꾼다. 날개가 돛으로 몸을 바꾸면서 개미는 짐을 진 자의 수고로부터 벗어나 돛배를 타고 가는 자의 가벼움을 누리게 된다.
산길을 바다로 바꾸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일으키는 놀라운 상상력의 정체는 결국 연민이다. 만약 우화등선(羽化登仙)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과 삶을 하나로 이으면서 세상에 없는 사물과 이름을 빚어낼 때, 어떤 신선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상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짐 진 자들의 수고와 함께 하는 상상력이라면.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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