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내겐 책도 자연이다. 고향이 없어졌으니 책으로 낙향한 것이다. 종이는 나무니까 책 속이 숲 속이 된다. 얼굴 이불도, 낮잠 베개도 된다. 아스팔트 키드에게는 도시가 자연이듯이, 내게는 책과 도서관이 대자연이다. 책으로 여행 갔다가 책으로 귀가한다. 책은 집이기도 하니까. 불경과 성경을 다시 읽는다. 불경 밖 성경 밖에서 읽고, 불경 안 성경 안에서도 읽는다. 해석자의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의 해석과 감동을 누리고 싶어서다.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착각되는 것이 고전이라고 한다. 고전 중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미 우리 생각이 되어버린 불경이나 성경이 특히 그렇지 않을까. 금년이 바로오 탄생 2,000년이라고 한다. 그 정확성이 어떠하든, 대석학 바오로의 글을 읽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신약성경의 40~60%(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제자들이 쓴 것까지)나 차지한다고 하니까. 나아가선 자칫 사교로 추락되고 말았을 예수의 가르침을 최고의 석학다운 지혜로 체계화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공자의 언행이 <논어> 라는 기록으로 남지 아니했더라면, 유교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어>
시인으로서 나는 신ㆍ구약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읽고 또 읽는다. 읽을수록 절실한 감동적 부분들이 무수해서, 도도하고 거대한 문학성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새삼 매료된 구절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시란 뭔가? 더 감동적인 시를 쓰기를 바라는 바이며, 노력하면 그런 절창도 쓰게 된다는 믿음 아닌가. 그것이 바로 바로오가 설파한 믿음과 다르지 않은 것. 소원하는 바의 실상이 모든 시인들이 쓰고 싶어 갈망하는 절창이라는 실상이니까. 시란 보이지 않는 것을 언어로서 보이게 쓴 글(증거)이니까. 그렇다면 바오로의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와 시는 동일 개념의 다른 표현 아닌가. 아마도 바오로는 학자이자 시인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인들이 시라는 사이비 종교의 사제를 자처하는 까닭이 바오로의 이 글귀와 같지 않은가. 종교를 가졌건 안 가졌건 삶과 죽음에서 신앙적 요소는 얼마나 자주 깊게 작용하는가 말이다. 불경과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만 단정하고는 고전, 고전이라고들 한다. 동서양의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고전의 고전인 성경과 불경과 <논어> 를 읽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오래 전 톨스토이의 <인생론> 을 읽다가, 원전인 성경이 더 감동적이었음에 실망한 적도 있다. 모름지기 모든 고전의 고전이야말로 모든 이의 필독서라고 단언한다. 인생론> 논어>
유안진 시인ㆍ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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