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버락 오바마는 외할머니가 길에서 걸인과 마주친 뒤 외할아버지에게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 남자 '흑인'이었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은 무거운 주먹처럼 오바마의 가슴을 강타했다.(오바마의 저서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검은 피부색이 사랑하는 외조부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흑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양부, 백인 어머니와 외조부모,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문화와 하와이의 다인종 문화 속에서 성장한 오바마는 20대 중반까지도 극심한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며 술과 마약을 일삼았다. 그가 거리를 헤매는 흑인이 아닌, 47세의 젊은 나이에 유색인종으로 최초로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어머니와 도시 빈민들과 소통하며 얻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신념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오바마를 키운 강한 어머니
오바마에게는 사실상 3명의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엄부(嚴父) 역할을 하지 못했다. 케냐 출신 유학생이었던 생부는 오바마가 두 돌 무렵 이혼하고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1971년 딱 한번 오바마를 만나러 왔다. 하지만 오바마는 "TV 시청을 멈추고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깜짝 놀라 아버지가 케냐로 돌아갈 날만 손꼽았다"고 말한다.
양부인 롤로 소에토로 역시 하와이대 유학 시절 어머니를 만났다. 오바마는 아버지를 따라 67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지만 4년 뒤 어머니가 다시 이혼하면서 하와이로 돌아온다. 사실상 아버지 역할을 한 이는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으로 오바마의 어머니가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해 전 세계를 떠돌 때도 묵묵하게 오바마 곁을 지켰다.
청소년기의 오바마가 비뚤어지지 않았던 것은 문화적 이해와 관용을 중시한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었다. 60년대 흑-백 간의 결혼이 금기시됐을 당시 흑인 남성과 결혼을 감행하고 두 번째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떠날 정도로 진보적인 어머니는 오바마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네시아에서 새벽 4시면 일어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민권운동에 대해 가르치며 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준 어머니는 자궁암으로 95년 사망했다.
빈민운동으로 정체성 혼란 극복하고 정치가로 성공
방황은 20대 중반까지도 계속됐다. 콜럼비아 대학 졸업 후 82년 생부가 사망하자 그는 뿌리를 찾기 위해 케냐로 떠나 내면의 갈등을 다스렸다. 이후 그는 시카고로 건너가 빈민들을 위한 흑인 일자리 창출, 공공임대아파트 환경 개선 등 활동을 하며 혼란을 극복하고 정치에 눈뜬다.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졸업 후에는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한 도시" 시카고로 돌아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고 시카고 대학에서 헌법을 가르쳤다.
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 투신한 그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흑인과 백인, 라틴계, 아시아계 미국인은 없다. 단지 통합된 미국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연설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오바마는 그 해 11월 일리노이주 역사상 최다 득표율을 기록하며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흑인으로는 세 번째였고 당시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오바마는 지난해 2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1858년 노예 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던 일리노이주 옛 주정부 청사 앞에서 대권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약 15개월 뒤 자신의 약점, 두려움, 콤플렉스마저 강점으로 승화시킨 긍정적 에너지의 승리를 보여주며 전 세계 국민들에게 담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최지향 기자 j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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