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곧 여행이다. 여행은 길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제주의 새 길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작년이었다. 올레('올레'란 집에서 큰 길로 나가는 좁은 오솔길이란 뜻의 제주 방언이다) 길이란 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해도 그냥 시큰둥했다. 제주 마을의 돌담 골목을 몇 개 이어놓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들먹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트레킹의 최고'중 하나로 꼽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던 같잖은 경험도 올레길에 대한 세간의 찬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다 최근 올레길을 낸 서명숙씨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을 읽고 난 후 달라졌다. 그 올레길을 한번 걸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명문 속의 길을 확인하기 위해 선뜻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놀멍>
그리고 올레 길을 걸은 뒤 여러 번 제주를 방문해 제법 제주를 안다고 했던 그간의 허언이 초라해졌다. 느릿느릿 간세다리(게으른 걸음)로 걷는 올레길. 상상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지난 총선 때 떨어진 386 국회의원 여럿이 찾았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성의 길'이라면, 제주의 진정한 내면을 두 발로 디디는 올레길은 자연과 유쾌한 수다를 떨며 근심을 풀어내는 '행복의 길'이다.
올레길을 걸어 보고 내린 결론 하나. 올레길을 걸어 보지 않은 이들이여, 제주의 속살을 보았노라고 함부로 떠들지 말지어다.
지금까지 올레길은 10코스까지 만들어졌다. 주로 제주 남쪽의 서귀포시 영역 안에 있다. 이번 일정에서 목표로 삼은 곳은 제5코스. 대평 포구에서 출발해 화순에 이르는 길이다.
대평 포구는 제주의 가장 막다른 포구다. 포구까지 찻길은 달랑 외길. 그 끝에서 만난 외진 아름답고 아담한 포구에서 올레길의 제5코스가 시작된다.
포구에서 바라보이는 높이 130m가 넘는 거대한 해벽이 '박수기정(기정은 벼랑의 제주 사투리)'이다. 길은 이 박수기정 위로 향한다. 코스는 2가지다. 벼랑 한가운데를 타고 오르는 급경사의 조슨다리 코스와 굽이굽이 휘어 돌아가는 몰질 코스다.
조슨다리는 대평 포구 사람들이 박수기정을 넘어 화순으로 넘나들 때 다니던 지름길이다. 200여 년 전 화순으로 가던 기름장수 할머니가 호미로 콕콕 찧으며 절벽을 오르다가 떨어져 죽자, 마을 주민들이 좁쌀 다섯 되씩을 거둬 석공을 불러 정으로 쪼아 만든 길이라 한다.
몰질(말길)의 기원은 원의 치하에 있던 고려 때로 거슬러 오른다. 박수기정 위의 너른 들판에 키웠던 말을 원나라로 싣고 가려고 천혜의 항구인 대평 포구로 끌고 내려오기 위해 낸 길이다. 몰질은 지난해 이미 복원됐고, 조슨다리는 올레꾼들에 의해 올해 다시 모습을 찾게 됐다.
길은 돌멩이에 칠해진 파란 화살표로 시작된다. 올레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다. 조슨다리 코스의 시작점을 놓치는 바람에 몰질 코스로 계속 올랐다. 대관령 옛길이나 구룡령 옛길처럼 아늑하게 휘어져 오르는 폭신한 흙길이다.
20여 분 오르자 벼랑 위다. 말이 풀을 뜯던 너른 벌판이 펼쳐졌다. 수만 평의 드넓은 들판엔 솔숲이 크게 우거졌고 돌담 두른 밭들이 이어졌다.
와랑와랑(이글이글의 제주 방언)한 햇볕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가득한 구름으로 찌푸린 얼굴이다. 벼랑가에 서니 270도 시야에 너른 제주 바다가 펼쳐진다.
이중의 천연 방파제에 둘러싸인 대평 포구의 모습이 그리 아늑할 수 없다. 곧 조슨다리 길의 종착점을 만났다. 아찔한 경사다. 벽 등반을 하듯 네발로 기어 올라야 하는 길이다.
올레길은 파도 소리를 벗삼아 벼랑 가로 이어진다. 길은 숲속으로 들어갔지만 바다는 계속 곁에서 따라온다. 정글 같은 녹음의 숲길이지만 귀에는 바다 소리가 가득하다.
봉수대를 지난 길은 남부화력발전소쪽으로 내려간다. 발전소 옆에서 올레길은 안덕계곡의 창고천을 따라 들어간다. 안덕계곡은 화산섬 제주의 몇 안 되는, 사철 물이 내내 흐르는 계곡이다. 최근 유명 관광지로 거듭난 서귀포시 효돈의 쇠소깍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그보다 작지만 더 아늑하고 조용하다.
길은 밭을 지나고 산담 두른 무덤을 스치고, 노랗게 익은 귤밭을 지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초기로 길을 다듬는 일행을 만났다. 간만의 인기척이라 인사를 하니 '제주 올레'의 서동성 사무국장이란 분이 명함을 건넨다. 자원봉사 나온 친구들과 올레길을 정비하러 나왔다 했다.
그들과 길동무 하며 올레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 사무국장은 "올레길의 컨셉트는 소음과 자동차로부터 자유롭고, 걸음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색의 길"이라고 했다.
파란 화살표의 이정표가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이 길을 찾는 이들의 80%가 여성인데, 초행 길에 대한 두려움을 이 화살표가 달래 준다"고 했다. 혼자 걷는 여성들에게 이 푸른 표식은 든든한 길동무인 셈이다.
계곡 벼랑 위로 길?이어졌다. 안전을 위해 쳐진 하얀 밧줄은 화순의 뱃사람들이 올레길에 바친 작품이다. 기암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 비경에 발걸음 내내 탄성이 쏟아졌다.
자원봉사 나온 서씨의 친구는 "여기가 고향이지만 이렇게 좋은 데가 있을 줄 몰랐다. 내년 여름에 바다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곳을 내 휴가지로 접수한다"며 좋아했다. 서 사무국장은 "예전 안덕계곡은 제주의 첫번째 꼽던 관광지였다"고 했다.
지난 수십여 년간 계곡 위로 골프장과 축사들이 들어서면서 물은 4급수 이하로 떨어졌고, 찾는 이의 발걸음도 끊어졌다. 최근 폐수 처리 시설을 갖추고, 효소를 이용한 정화작업이 펼쳐지며 반갑게도 1급수의 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원시림의 짙은 계곡을 벗어난 올레길은 화순 마을을 거쳐 화순해수욕장에서 끝난다. 제5코스의 끝이자 제6코스의 시작점이다. 제주올레 일행은 내친김에 6코스 일부도 함께 가자고 했다. 물론 오케이다.
화순해수욕장은 흑사장이다. 까만 모래가 찰지게 들어앉았다. 올레길은 담수 풀장을 지나 웅장한 해벽 밑으로 뻗는다. 퇴적암 절벽은 물결로 가득했다. 그 절벽 바위들이 커다란 덩어리로 떨어져 내렸고, 물결의 무늬는 서로를 엇갈리며 기묘한 대칭을 이뤘다. 변산의 채석강이나 적벽강의 감동 그 이상이다.
작은 언덕 위의 당에서는 해녀들이 제를 지내고 있었고, 주상절리를 이룬 검은 암벽 사이엔 딱 한 가족이 놀 만한 앙증맞은 백사장도 나타났다. 일명 '나 홀로 백사장'이다. 화순해수욕장에서 용머리해수욕장까지의 화순해안길은 서명숙씨가 올레 코스 중에서도 '명품 길'로 인정한 곳이다.
아무도 없는 텅빈 백사장을 지나 산방산 아래 도착했을 때, 해는 송악산 너머로 저버리고 어둠이 길을 막아섰다.
서귀포=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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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성산~대정 하모해수욕장 '올레길 10코스'
제주 올레길은 현재 성산에서 대정 하모해수욕장까지 길게 이어졌다. 코스는 개설 순서에 따라 1에서 10까지 번호가 붙었다. 각 코스의 소요 시간은 4,5시간. 하루에 한 코스가 적당하다.
● 1코스는 성산읍 시흥초교에서 시작해 종달리 일출봉을 경유해 광치기 해안까지의 15km. 오름과 해안의 복합 코스다. 제주의 바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코스다.
● 2코스는 서귀포 시내 동쪽 끝 쇠소깍에서 시작해 보목포구와 소정방 폭포를 지나 외돌개까지 이어지는 14.4km의 길이다. 중간에 이중섭미술관 등을 지나는, 문화와 생태가 함께 하는 길이다.
● 외돌개에서 다시 시작하는 3코스는 법환포구와 강정포구를 거쳐 월평 포구에 이르는 15.1km의 해안길이다. 공물 해안길 인근에선 끊어진 길을 제주 뗏목인 테우를 이용해 건넌다.
● 4코스는 월평 포구에서 시작해 대포 중문 하예 포구를 경유해 대평 포구까지 이른 17.6km의 코스. 포구를 연결하는 포구 올레다. 중문의 하얏트호텔 밑으로 해서 거대한 주상절리인 중문 갯깍 밑으로 지나는 길이 압권이다.
● 5코스는 대평 포구에서 박수기정을 지나 안덕계곡을 우회해서 화순해수욕장에 이르고, 6코스는 화순해수욕장에서 용머리해안, 송악산을 거쳐 하모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 7~10 코스는 그 동안 끊겨 있던 쇠소깍에서 성산 광치기 해안을 잇는 길이다. 7코스는 광치기 해안에서 출발해 식산봉, 대수산봉, 혼인지를 거쳐 온평 포구에 이르는 17.2km의 중산간 코스다.
● 8코스는 남원포구에서 쇠소깍까지, 9코스는 온평포구에서 표선백사장까지, 10코스는 표선 당케포구에서 남원포구까지 이어진다.
제주올레 사무국은 앞으로 계속 이어 제주를 전체 한바퀴 감싸 안는 올레길을 완성할 계획이다. 제주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에서 구체적인 코스와 각 구간에 머물 숙소와 맛집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제주올레 사무국 (064)739-0815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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