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아침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 경로당 앞 정자. 날이 새자마자 집을 나선 10여명의 어르신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마다 옆구리에 콩자루 하나씩 끼고 앉아 있다. 시내에서 닷새마다 서는 영천 오일장에 가는 길, 콩을 팔아 반찬거리도 사고 병원에도 다녀올 참이다.
"마, 이제, 우리 마을도 해방된 기라예." 한 할머니는 1일부터 하루 4차례 시내버스가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을 대뜸 '해방'에 빗대며 연방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7시10분 버스가 들어오자, 어르신들은 서로 도와가며 곡식자루를 버스에 실었다. 빈 좌석은 물론 좌석 사이 통로에까지 곡식자루가 들어찼다. 앞 마을에서 타고 온 10여명에다 새 승객들과 짐이 더해지니 버스는 금세 만원이 됐다.
운전기사는 무뚝뚝한 경북 사람답게 살가운 인사 한마디 없었지만, 어르신들이 짐을 싣고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는 동안 미소를 띄운 채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용화리의 최고령자인 이재술(80)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저 앞에 큰길까지 (짐을) 지거나 경운기로 실어 날라야 했는데 마을 안까지 버스가 들어오니 편하기 이를 데 없다"며 "올해는 하도 가물어 소출이 적었지만 콩값이 좋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영천시내에서 20여㎞ 떨어진 용화리는 영천과 포항을 잇는 69번 지방도에서 1.5㎞ 가량 더 들어가야 하는 영천댐 주변의 작은 마을이다.
원래 기룡산(騎龍山) 자락의 작은 계곡마다 형성된 화전민촌을 포함해 107가구가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화전민들이 모두 떠나고 29가구 70여명이 벼농사 짓고 고추, 콩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큰 길에서 마을까지 실개천을 따라 나 있는 진입로는 승용차도 비켜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 노선버스는커녕 전세버스도 잘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시내버스가 들어오자 주민들은 3일 마을잔치를 열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지역 인사들을 초청해 수육과 과일 등 손수 장만한 음식을 나누며 "600년 전 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사건'"을 경축했다.
이장 이광태(54)씨는 "얼마 전 외지에서 온 아이들 있는 한 집을 제외하면 내가 마을에서 가장 젊고 주민 90% 이상이 60대 이상"이라며 "큰 길까지 버스 타러 걸어나가야 하는 1.5㎞ 남짓한 길이 젊은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칠순 넘은 어르신들은 20~30분씩 걸려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특히 신경통 관절염 등 각종 질환을 몸에 달고 살아 병원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는 어르신들에게 시내버스 운행은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구모(64ㆍ여)씨는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가고 싶어도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며 "이제 버스도 들어오고 하니 가을걷이 마무리하고 나면 못다 한 치료를 마저 해야겠다"고 말했다.
다른 할머니도 "이제 고추나 콩, 마늘을 장에 내다 팔기도 수월해졌다"며 "나도 콩 타작 하고 마늘 심고 나면 아픈 손가락을 치료하러 시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요즘 이 마을에는 버스가 들어오는 시간대에 진입로와 회차지인 경로당 앞에 차량이나 경운기 등 농기구를 절대 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무심코 세워뒀다가는 마을 전체 주민들의 발이 한동안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용화리 외에도 화남면 사천2리, 고경면 칠전리, 북안면 용계리, 남부동 근노3통 등 4개 오지마을에서 이 달부터 시내버스 운행이 시작됐다. 영천시가 버스업체가 고유가를 이유로 요청한 일부 노선에 대한 감축운행을 승인하는 대신, 기존 노선을 연장해 교통소외 지역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 덕이다.
영천시 관계자는 "이들 지역은 인구가 적어 빈 차로 운행할 때도 허다하지만 아파도 교통이 불편해 참던 어르신들이 부담 없이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천=정광진 기자 kjche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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