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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4> 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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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4> 구슬

입력
2008.11.10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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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게 하는 것은 알코올만이 아니다. 빛깔이든 소리든 생김새든 맛이든, 사람을 취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그 취기가 황홀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사랑이 태어난다. 아니, 그 취기가, 황홀감이 사랑(의 생리학)이다. 내 기억 가장 깊은 속에 박혀있는 취기는, 다시 말해 내 최초의(그리고 어쩌면 최고의) 황홀감은 빛깔에서 왔다.

유리구슬의 빛깔이었다. 아무 유리구슬이나 내게 황홀감을 베푼 것은 아니다. 유년기의 나를 황홀하게 한 것은, 우리들 꼬맹이들이 흔히 '아리랑구슬'이라 부르던(확실치는 않다. 시간은 기억을 지우거나 뒤튼다), 알 속에 빨강과 파랑(과 때로는 노랑)을 어울러 박았던 구슬이었다.

그 구슬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몸이 붕 뜨는 듯하면서, 현실감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빛깔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어쩌면 그 원형(圓形)의 아름다움에도 취했을지 모른다.

나는 황홀해졌다. 사랑에 빠졌다. 마약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넋을 잃고 아리랑구슬을 바라보던 유년기의 그 기분은 소위 '하이(high)' 상태와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아리랑구슬을 볼 때마다 내가 '하이'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아리랑구슬을 통한 '하이'는 어떤 계기를, 조건을 요구했다. 그 계기나 조건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들이 외부에 있었는지 내 몸 속에 있었는지도.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 계기와 조건이 우연히 들어맞아 아리랑구슬이 내 마음을 몸에서 떼어놓았을 때, 나는 상상 속의 낙원이나 유토피아에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어질어질한 그 황홀감! 먼 기억 속의 아름다움은 제멋대로 부풀려지는 법이어서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아리랑구슬의 빛깔이 내게 준 황홀감을 나는 그 뒤로 다시 겪지 못했다.

모차르트나 신중현의 음악도, 셰익스피어나 서정주의 시도, 파리 루브르나 마드리드 프라도의 온갖 예술품들도 내 두 발을 지표에서 그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리지 못했다. 맛난 술이나 경쾌한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눈에만 보이는 값진 보석

2001년 세밑, 워싱턴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 곳 자연사박물관엘 들러 온갖 보석들이 진열된 방을 찾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찼었다는 요란한 목걸이에서부터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수정구슬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기보요석(琪寶瑤石: 기화요초를 비튼 말이다)'을 다 보았다.

그러나 그 화사한 방에서도, 아리랑구슬이 유년의 내게 베푼 황홀감을 끝내 누릴 수 없었다. 아리랑구슬의 세계는 내가 유년기를 넘기며 '잃어버린 낙원'이었다. 그 '좋은 곳'(Eutopia)은 '세상에 없는 곳'(Utopia)이었다.

유년기의 우리 꼬맹이들은 구슬을 '다마'라고 불렀다. '구슬'은 교과서나 사전 속에 박제돼 있는 말이었을 뿐, 구슬을 '구슬'이라 부르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다마'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첨단 컴퓨터게임이 지천인 시대에 '구슬치기' 같은 '원시적'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도 거의 없을 테다.

구슬을 '다마'라 부르던 유년기에도, 그것이 일본말이라는 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구슬'이라는 우리말의 어감이 너무 '모범생적'이어서(즉 생경해서) 그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드센 힘은 어느 순간 내 마음 속에서 그 두 말의 어감을 바꿔놓았다. 이젠 '다마'라는 말이 비속하게 느껴지고, '구슬'이라는 말이 친숙하면서도 기품 있게 들린다. ('다마'야, 미안하다!)

지니고 있는 일한사전에서 '다마'를 찾아보았다. 한자로는 玉(옥)이라고 쓴단다. 그런데 그 뜻이 '구슬'보다 훨씬 넓다. 커다란 뜻만 살펴도 '옥(玉)'(특히 진주 따위의 주옥[珠玉]), '구슬' 이외에 '(눈물이나 이슬의) 방울', '알(달걀, 주판알, 안경알, 스테이플러 알 따위)' '(국수의) 사리' 따위가 있었고, 속어로는 '창녀'나 '범인'을 가리키기도 한단다.

옥이나 구슬이나 (눈물)방울 따위를 뜻할 땐 珠(주)라고 쓰기도 하는 모양이다. 또 球(구)라고 써서 야구공이나 테니스 공, 당구알 따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彈(탄)이라고 쓰면 총알의 뜻이라 한다. 이 외에도 자잘한 여러 뜻이 있는데, 대개 원형(圓形)이나 귀중(貴重)함과 관련된 의미들이다.

내친김에 국어사전을 들춰 '구슬'을 찾아보았다. "1) 보석붙이로 둥글게 만든 물건. (흔히, 꾸미개나 패물로 쓰임) 2) 진주 3) 사기나 유리 따위로 눈깔사탕만 하게 만든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의 한 가지"라고 풀이돼 있다.

일본어 '다마'처럼 원형과 관련된 뜻들이기는 하나, 의미 영역이 훨씬 좁다. 그것도 주로 세 번째(와 첫 번째) 뜻으로만 쓰일 뿐, 두 번째 뜻으로는 거의 쓰지 않는 것 같다. 요즘의 젊은 한국어화자로서 '구슬'을 '진주'와 포개는 사람은 드물 테다. 실상 한자 玉(옥)을 '구슬'이라 새겨 '구슬 옥'이라 일컫지만, 정작 '옥'과 '구슬'을 포개는 한국인도 거의 없을 테다.

일본인들이 한자 珠(주)를 '다마'라고 읽듯, 한국인들도 이 글자를 '구슬'이라 (또는'진주'라) 새기지만, 珠와 구슬이 고스란히 겹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튼 '구슬 주(珠)'와 '구슬 옥(玉')이 합쳐져 주옥(珠玉)이 되면 값지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의 비유가 된다. "<눈길> 을 이청준의 주옥편(珠玉篇)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에서처럼.

일본어 '다마'의 뜻이 그렇듯, 한국어 '구슬'의 뜻도 대체로 원형과 관련돼 있다. 실은 어원적으로도 그렇다. 구슬의 어근 'kus-'는 원형개념 형태소 'kup-(曲)'의 마지막 소리 /-p/가 /-s/로 변해 생긴 것이다. 옛 팔찌를 뜻하는 일본어 '구시로(釧)'는 '구슬'의 차용어이거나 동원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구슬'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선 '古斯'로 표기되었고, 송(宋)나라 때 사람 손목(孫穆)이 고려를 다녀간 뒤 지은 백과서 <계림유사> 에선 '區戌'로 음차되었다.

한국어의 원형개념 어근 'kup-'은 'kus-' 외에 'kum-', 'kop-', 'kkup-', 'kkop-' 따위의 이형태를 지녔다. 예컨대 굽(蹄), 굽다(曲), 구멍, 구부리다, 굽이굽이, 꾸벅이다, 꾸부렁하다, 꾸부정하다, 굽실굽실, 꿈틀거리다, 꼼지락거리다, 궁둥이 따위의 낱말들은 모두 둥그런 모양이나 움직임('움직이다'의 '움' 자체가 'kum-'의 첫소리가 탈락한 것일 수 있다)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이 낱말들은 자매어들이다.

情人의 믿음 사랑의 매개체로

한국어에서 '구슬'을 사랑의 말로 만든 결정적 공을 세운 것은 고려가요 '서경별곡(西京別曲)'과 '정석가(鄭石歌)'에 동시에 나타나는 소위 '구슬 연(聯)'일 것이다. 반복구와 여음구를 빼고 이 연을 현대 표기로 바꾸면 대강 이렇다.

"구슬이 바위에 디신달/ 긴힛단 그츠리잇가./ 즈믄 해를 외오곰 녀신달/ 신(信)잇단 그츠리잇가." 이를 현대어로 바꾸면 대체로 이런 뜻일 것이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이 노래에서 정인(情人) 사이의 믿음은 끈에 비유된다. 그 끈으로 꿴 구슬들이 정인들(사이의 사랑)이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다 해도, 다시 말해 두 사람에게 큰 역경이 닥친다 해도, 설령 천 년을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 해도, 두 사람 사이의 믿음과 사랑은 여전할 것이라는 얘기다.

사랑의 노래가 흔히 그렇듯, 이 노래도 감정의 격함에서 나온 과장(천 년을 산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탓하랴? 사랑이란, 정념이란, 보기에 따라 마음의 병인 것을.

사적인 얘기지만, 내 아내 이름이 귀주(貴珠)다. 귀한 구슬이라는 뜻이다. 진주라는 뜻이다. 주(珠)만으로도 진주라는 뜻을 지녔지만, 귀한 진주다.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보니, 양식진주나 모조진주가 아니라 천연진주임을 알겠다.(나이가 들어가면서, 푼수 짓에 점점 대범해진다!) 그녀는 내게 속하기에는 너무 귀한 진주다.

한 달쯤 전, 구슬을 박은, 다시 말해 진주를 박은 반지 하나가 생겼다. 술자리에서 한 친구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물론 위협으로 뺏은 것이 아니라 교언(巧言)으로 받아낸 것이다.

사람을 취하게 할 만큼 진주가 예쁠 수 있다는 걸 이 반지를 보고 알았다. 잠잘 때도, 샤워할 때도 나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고 있다. 그 반지의 구슬을 보고 있자면, 귀주 생각도 나고 친구 생각도 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년기의 취기와 황홀함에 가까운, '하이' 비슷한 상태에 다다른다. 그것은 '되찾은 낙원'일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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