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부터 대학생까지 50여 명의 결손 가정 자녀들이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의 경생원. 5일 오후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이곳에서 시끌시끌한 소리와 북적북적한 활기가 새어 나왔다.
선생님과 아이들, 그리고 겨울 김장을 하러 온 자원봉사자들까지 흰 장갑을 나눠 끼고 흰 천이 씌워진 담장 앞에 길게 늘어섰다. "하나, 둘, 셋!" 외침에 맞춰 힘껏 끈을 잡아 당기자 긴 담벼락 위로 알록달록한 모자이크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삐뚤삐뚤한 모양에 각기 다른 색깔의 타일 조각들이 만나 쌍둥이처럼 솟아 있는 언덕 위의 집을, 오리가 놀고 있는 연못을, 물방울이 왕관처럼 솟아오르는 빌딩을, 물고기의 집에 초대받은 새를, 꽃이 핀 시계탑을 만들고 있었다.
뻥 뚫린 하수구 구멍도 주위에 붙은 색색의 타일 꽃잎 덕분에 예쁜 꽃이 됐다. 아이들이 드나드는 검정색 철문도 사계절을 주제로 한 설치물이 더해져 화사하게 바뀌었다. 썰렁하던 실내공간의 벽에는 잠자리와 나비, 벌 등 곤충과 꽃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예쁘게 자리잡았다.
이 모든 것은 경생원에 사는 초등학생 아이들과 '문화나눔 사랑터' 소속 화가와 조각가 14명이 두 달간 힘을 합쳐 만든 결과물이다. 아홉살 재림이는 "내가 그린 그림이 어디 있는지 보여주겠다"면서 손을 잡아 끌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양이랑 숲 속 풍경을 그렸어요. 숲에는 나무도 있고, 연못도 있잖아요. 아침 운동을 하기에도 좋고, 아, 사슴 같은 동물 친구들과 놀 수도 있어요."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열살 아름이는 "예쁜 성을 그렸다"고 말했다.
"공주와 함께 놀 수 있으니까요. 타일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화가 선생님들한테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
'골목길에 피어나는 꿈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생원의 담장 꾸미기 사업은 서울문화재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 동네 문화 가꾸기'의 하나로 진행됐다.
문화 소외지역민과 전문 예술가들을 연결시켜줌으로써 낙후된 지역 환경을 문화로 소생시킨다는 취지의 사업으로, 시설 보수나 일방적인 작가 위주의 환경 개선 사업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과 참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공모를 거쳐 두 달 전인 9월 3일 이곳을 처음 찾아온 작가들은 낡고 우중충한 시멘트벽 담장에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불어넣기로 했다. 그리고 작업의 전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했다.
'나만의 상상의 집'이라는 주제 아래 건축가 가우디와 훈데르트바서 등의 작품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고,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아이들은 직접 집을 짓는다면 어떤 곳에 어떤 모양으로 짓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그림으로 그려 제출했다. 전문가들의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이 그림들이 타일 모자이크가 됐다.
금세 더러워질 수 있는 벽화에 비해 타일은 닦으면 되기 때문에 지속성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미장을 하고 타일을 붙이고 흰 칠을 하는 등 모든 과정에 아이들이 참여했다.
화가 황은화씨는 "작업하는 동안 그림이 너무 예쁘다며 벽 앞을 떠날 줄 모르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던 아이들도 타일을 하나하나 직접 붙여나가면서 반응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를 이끈 조각가 김래환씨는 "타일이 날카로우니까 조심하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손 다쳐도 괜찮아요'라고 하더라. 그 열의에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늘 혼자 작업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나만 생각하고 살다가 아이들에게 꿈과 상상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큽니다."
동네 주민들도 경생원의 달라진 담장을 반기고 있다. 골목길 전체가 환해졌기 때문이다. 담장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주민 정명애(49)씨는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타일로 모자이크를 해서인지 독특하면서도 따뜻해 보인다. 동화 속 세상을 보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경생원의 사회복지사 최은미(43)씨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복지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다"면서 "외부 세계와 직접 닿아 있는 담장을 새롭게 꾸밈으로써 그런 시선들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아이들이 단순히 담장을 예쁘고 신기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그리고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자긍심과 애착이 있다. 정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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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지는 공공미술
공공미술. 영국의 미술 행정가 존 윌렛의 1967년 책 '도시 속의 미술'에서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오랫동안 야외에 설치된 커다란 조형물들을 이르는 말로 인식돼 왔다. 서울에는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작품들이 수천점에 이른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앞의 '망치질하는 남자'나 대치동 포스코 앞의 '아마벨'처럼 명물이 된 것도 있지만 청계천의 '스프링'처럼 수십억을 쏟아 붓고도 비웃음만 사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는커녕,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지역의 역사성과 특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공공미술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대형 작품을 공공 장소에 설치하는 데 그치던 것에서 지역민의 삶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매개체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문화관광부가 실시한 '아트 인 시티'를 비롯해 현재 진행 중인 서울문화재단의 '우리 동네 문화 가꾸기'나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같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들도 작은 동네나 상가, 시장 같은 일상적 공간에 주목하고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공공미술 전문가인 박삼철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단장은 "그간 공공미술은 철저하게 전문가의 관점에 의해 작업 공간 안에서 예술 행위가 이루어진 뒤 그것을 바깥 공간에 끼워 넣는 식이었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미술의 관심사가 작품의 '질'에서 '관심'을 주고받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면서 공공미술을 인터넷 공간으로 옮겨와 소통을 시도하는 사례도 생겼다. 독립 큐레이터인 이혜원, 박대정, 정현씨가 기획해 최근 오픈한 '서울환경미화도' 프로젝트는 서울의 공공미술이 물리적인 공간의 조형물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판단,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이버 공간(www.artpublicart.org)에서 가상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렇듯 변화의 바람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에도 국내 공공미술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미술계가 아닌 관 주도로 이뤄지다 보니 행정적인 시혜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고, 작품의 질이 수준 이하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삼철 단장은 "단지 찾아간다는 시혜적 요소만으로 공공미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술이 사회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적 공공미술 행사인 독일 뮌스터 조각프로젝트 총감독 카스퍼 쾨니히는 최근 방한 때 "공공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의 참여이며,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작품의 질"이라고 말했다. 간단한 이 말 속에 공공미술의 핵심이 들어있는 셈이다.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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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공공미술의 현장
도시나 건물의 외관만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미술작품을 통해 사람이 즐거워지도록 하는 공공미술은 일본에서도 일찌감치 일어났다.
기타카와 후라무 ㈜아트프론트갤러리 대표가 참여한 다치카와(立川) 재개발 사업은 사람 중심적인 도시재정비의 전형을 처음 선보인 사례로 꼽힌다.
도쿄(東京) 인근의 다치카와시는 1991년 옛 미군기지 부지를 주거지로 재개발하는 사업을 공모에 붙였다. 기타카와 대표는 다양성의 가치를 내세운 계획으로 공모에 선발됐다.
구 소련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인터넷이 개발되는 등 점차 다양해지는 세계의 격동기를 반영하자는 의도에서 37개국 90여명 작가의 작품 107개를 마을 곳곳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지역 전체가 미술관이나 마찬가지지만 명작을 모셔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개념이 아니라 만지고 앉고 즐긴다는 새로운 시도였다.
가령 '넌 여기 앉아 있기만 해, 내가 언제나 지켜볼게'라는 작품은 땅바닥에 남겨진 슬리퍼 위로 그림자 모양만 덩그러니 새겨져 있어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잡는다.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가방 모양의 '최후의 쇼핑'은 건물의 배기통 구실을 하고 있다.
지하철역에 새겨진 '연속된 원'은 보는 위치에 따라 타원 또는 원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밖에 벤치이자 미니자동차 장난감 역할을 하는 경계석, 산타클로스 모양의 가로등 등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더구나 이 '마을 미술관'은 시민들 스스로 작품을 청소하고 돌보면서 지역주민들을 공동체로 엮어내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수준도 높은 것들이어서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 100억엔의 예산을 들였는데 지금은 하나에 15억엔이 나가는 작품도 있다.
1994년 완성된 '파레 다치카와'는 우루오이문화상, 일본도시계획학회 계획설계상, 일본건축미술공예협회 특별상 등을 휩쓸었다. 예산을 지원한 도쿄도 관계자들은 미술작품들이 너무 많고 쓸모없다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지금 다치카와의 사례는 도시계획의 전범처럼 여겨지고 있다.
에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쿄 시내의 다이칸야마(代官山)에서 2년마다 열리고 있는 인스퍼레이션전(展)도 이와 비슷한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2년마다 작품을 공모하고 선발해 설치하는데 '미인 사용금지' 등등이 쓰인 코인 라커('나는 뭘까?'), 진짜 지하철역의 입구와 똑같이 생긴 가짜 지하철 역 입구(힐사이드 테라스 역) 등 재기발랄한 작품들이 넘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행사가 열리는 다이칸야마 거주자들이 유난히 밝은 원색의 옷을 많이 입는 것으로 드러난 한 조사 결과이다.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니가타(新湯)현 농촌마을에서 펼쳐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페스티벌인 '에치코-쓰마리(越後妻有) 아트 트리엔날레'는 현대사회에서 미술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지역은 도쿄에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지만 도쿄시와 맞먹는 760㎢ 넓이에 단 3만명이 살며 거의 노인들뿐이다.
하지만 2000년 이후 3회까지 행사가 열리는 해에는 세계 각국의 작가, 미술을 공부하는 도쿄의 학생, 그리고 관광객까지 1만5,000명이 몰려들었다.
2006년 설치작품은 총 500점에 달했고 그 중 170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지역 주민들은 기쁨에 겨웠고 지역경제도 한껏 살아났다.
"도시도 아닌 농촌에서 무슨 미술 행사냐"며 4년 반 동안이나 반대했던 일이 없었던 일처럼 잊혀졌다. 내년 4회 페스티벌에는 예산 7억5,000만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는 지방정부로부터, 대다수는 세계 각국의 기업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김희원기자
■ 인터뷰/ 일본 공공미술 선구자 기타카와 후라무
"공동체 기반으로 하지 않은 미술은 의미없다" "미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기타카와(北川) 후라무(62) ㈜아트프론트갤러리 대표는 일본 공공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문센이 최초로 남극을 탐사할 때 타고 간 탐사선박의 이름(Fram)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후라무'라고 지었다.
그는 1974년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한 뒤 도쿄 인근의 다치카와(立川)시 재개발과 삿포로(札幌) 월드컵경기장 아트설계 등을 도맡았고, 예술과 사회를 잇는 작업으로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예술선장(選奬) 문부과학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최근 도쿄 시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미술과 도시계획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거리를 만들 때에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컨대 에도시대 때부터 거주지의 흔적을 간직한 다이칸야마(代官山) 지역은, 지진이 나서 고립되더라도 서로 도와가며 생존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연대감이 있습니다. 예술은 이러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도시계획은 의미가 없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도쿄 도심의 화려한 재개발 사례로 꼽히는 롯폰기힐스나 미드타운에 대한 기타카와 대표의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는 "상업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재개발은 위험하다"며 "롯폰기힐스 같은 경우도 투자한 만큼 수익을 뽑고 나면 다시 허물지 모른다. 더 그럴듯한 것이 나오면 또 없애버려 오래 가지 않는 것이 일본 도시설계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20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이다.
미니애폴리스는 20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생활권이 갈리면서 갈등이 생기는 등 문제가 있었다. 한 예술가가 이 도로 위에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육교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자 시에서는 "왜 그런 허튼 돈을 쓰느냐"며 심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다리가 놓였고 도시는 화합을 되찾았다. "좁은 통로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순간적으로 친해집니다. 이것이 예술의 힘입니다. 예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바꾸게 하거든요."
그는 숱한 반대와 역경을 겪으며 사회운동을 하듯 미술작업을 벌여왔다. 사업 주체인 정부의 공무원은 물론, 지역 주민들도 미술 설치를 반대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반대가 있어야 시민의식도 길러진다"며 논란과 토론 과정 자체를 중시하고 있다. 간혹 어떤 작품은 아무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더라도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지자체들이 최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공공디자인에 대한 조언으로 그는 "문화행사는 월드컵과 다르기 때문에 지역적 특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작품의 수준이 세계적이어야 자칫 조각공원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 사람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글·사진= 도쿄 김희원기자 he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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