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50대초반의 중년 주부랍니다. 4남매 중 막내로 자라 가족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지요. 그래선지 부모님이 더욱 아끼시는 바람에 조금은 버릇도 없거니와 겁도 없었지요. 그 시대 1960년대에는 가정부를 두고 사는 가정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저희는 그래도 조금의 여유가 있었기에 가정부도 있었답니다.
또 '치맛바람'이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여인네들이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지요. 당시 저의 엄마는 한복의 맵시가 아주 예뻐서 항상 외출 시에는 한복을 입으며 치맛바람을 날리곤 하였답니다. 그러니까 그 치맛바람의 주인공이 바로 저의 엄마였답니다.
오빠와 언니를 초등학교 때부터 거액의 과외비를 들여 학교선생님께 맡기고 학교를 수시로 드나들며 과외바람에다 큰돈을 굴리면서 곗돈 태워주랴 받으랴 바쁜 계주 역할까지 했던 저의 엄마는 그 지역에서는 자칭 큰손 이었답니다. 큰손인 엄마의 모습을 보고자란 저도 어느날 역시나 큰손 못지않은 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까 겨우 10살 때 였습니다. 군것질에다 장난감도 사고 만화가게도 가고, 또 학교에서는 반장이라 아이들에게 과시도 할 겸 저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 하였답니다.
엄마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돈은 한계가 있었기에 저는 고심 고심하다가 겁도 없이 엄마 친구들을 찾아 엄마가 급히 돈을 빌리는 양 세 군데나 들러 돈을 마련했습니다. 엄마와 같이 계도 하시는 친구분 들이라 가끔 제가 심부름도 가곤 하였기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세 군데 다 원하는 만큼 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돈으로 학교 앞에서 오뎅도 사먹고 떡볶이, 튀김, 소라 등 이것 저것 먹고 싶은 대로 사먹고, 또 친구들도 불러다가 먹이고, 제가 좋아하는 만화가게에 들러 어두워질 때까지 원 없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지내던 중 드디어 일이 터졌답니다.
빌려준 돈이 적은 금액이라 엄마의 친구들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그래도 아무 이야기가 없자 엄마에게 "빌려간 돈 돌려주지 않느냐"고 했나 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난리가 났지요. 엄마한테 붙들려 처음부터 안 죽을 만치 맞기도 했지만, 무려 세 군데나 된다고 고백한 뒤에 몇 곱배기로 맞은 것은 안 잊혀지더이다. ㅎㅎㅎ. 엄마의 추궁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돈 어디에 썼느냐고. 제 또래 아이들이 쓰기에는 큰 금액 이었으니까요. 저는 너무 무서워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그 친구 집으로 가서 확인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저를 앞장 세웠습니다.
그날은 가장 무더운 8월 여름날이었습니다. 한복을 차려 입으신 엄마는 햇빛 가리는 양산을 쓰고 저를 앞장 세워 친구집으로 향하였답니다. 저는 저와 제일 친한 저희 반 여자 부반장이 사는 금호동 꼭대기로 무작정 향하였습니다. 물론 무작위로 선택한 저의 생각이었지요. 제가 사는 곳은 행당동이니까 부반장 친구 집까지는 걸어서 30여분 거리나 됐습니다. 그것도 산꼭대기까지 구불구불 좁은 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지요.
그 더운 여름날 엄마의 무서운 눈초리와 구박을 받으며 산꼭대기에 거의 도착할 무렵 엄마는 "아직 멀었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엄마, 잠깐만 기다려봐. 가서 보고"하고서는 엄마를 산꼭대기 그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세워놓고서는 다른 길로 돌아 도망치듯 내려왔답니다.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혼날 것만 무서워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그리고선 바로 집으로 갈수 없어 다시 만화가게에서 속절없이 만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 무렵에 작은 오빠가 만화가게로 저를 찾으러 왔습니다. 엄마가 찾는다면서. 드디어 올 것이 온 거지요. 죽었구나 생각했지만 더 이상 도망 갈 곳도 없으니 집으로 찾아 들었지요. 그날 엄마는 그 뙤약볕 아래에서 오랫동안 땀 흘리며 저만 기다리시다 이곳 저곳 저를 찾으며 돌아다닌 끝에 지쳐 내려오셨나 봅니다. 그날도 저는 안 죽을 만큼 맞았고 저를 미닫이 문으로 된 붙박이 장안에 가두어 놓고는 그 곳에서 그날 밤 잠을 재웠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출근하신 후 다시 취조가 시작 되었어요. 자수해서 광명을 찾으면 될 것을 또 무서워서 끝까지 친구 빌려줬다고 하자 이번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를 제게 딸려서 돈 빌려줬다는 친구 집으로 보냈답니다. 그래서 다시 금호동 산꼭대기를 가게 되었지요. 그날 올라간 곳은 엄마와 전날 올라갔던 산꼭대기와는 반대편인 차도 건너편 금호동 산꼭대기였습니다. 언니는 올라 가다가 중간 중간 멈추면서 "어디야?"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저기" "저~기" "저~~기, 저~~~기" 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산꼭대기에 도착 했습니다. 언니는 다시 "어디야?"라고 물었지요. 꼭대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었습니다. 막막해진 저는 머뭇거리며 저 멀리 한강 건너편 쪽을 가리키면서 "저~~~~기"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했습니다.
언니가 저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인 겁니다. 언니 입장에서는 정말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어요. 저기, 저~기, 저~~기 저~~~기 하다가 강 건너편 저 먼 곳을 가리키니 기막힐 일이었겠지요. 저는 울면서 언니 뒤를 졸졸 따라 금호동 산꼭대기를 내려 오면서 욕도 엄청 먹었답니다.
집에 도착한 뒤 언니는 엄마에게 온갖 푸념을 다 내뱉었고 당연히 엄마의 회초리는 다시 곱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로부터 며칠간은 엄마의 무서운 눈초리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어둠의 시간이었지요. 사실 엄마의 책임도 크다 생각합니다. 허구헌날 어린 저 앞에서 큰돈이 오고 가곤 했으니 제가 얼마나 간덩이가 커졌겠습니까? 지금도 가끔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금호동 산꼭대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저에게 "하여간 제가 통도 컸어. 겁도 안났었나 봐"하시면서 눈을 흘기곤 한답니다. 호호호.
경기 양평군 - 황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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