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동네에 책이 많았다. 어느 집이든 놀러 가면 눈에 띄는 책이 있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구슬과 책을 맞바꾸기도 했고, 며칠 빌린다고 가져온 책이 한없이 내 책장에 꽂혀 있기도 했다.
만화책과 동화책뿐 아니라, 이따금 문학 잡지와 전집 등 어른 책들도 내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 그렇게 해서 때이른 나이에 김동리, 심훈, 귄터 그라스 같은 작가들을 접했고, 깨알 같은 글씨에다 세로쓰기로 된 김동인 전집을 독파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며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일이 주된 일과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독서 열기를 부추기는 데 한몫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느 집 마당에 모여 앉아 못꽂기를 하거나 공사판에서 주워온 석판에 자기가 아는 퍼즐이나 퀴즈를 적어놓고 서로 맞추기 놀이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누가 더 많이 아는지 자랑을 하게 되고, 이런 저런 책에서 주워 읽은 이해도 못한 말들을 떠들어댔다.
이제는 한낱 추억거리에 불과한 그 지식 습득과 공유 방식이 학원에서 선행학습 형태로 이루어지는 지금의 방식보다 더 낫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이 놀이와 결합된 느슨한 방식보다 나은 점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옛 추억을 틈틈이 떠올릴 만한 나이가 되니, 인생에 추억거리를 더 많이 남기는 방식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게다가 "배워서 남 주냐"는 타박에 아이에게 그렇다고 통쾌하게 대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이 아닌가.
동네에 온갖 책이 있긴 했지만, 어른 중에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막노동꾼을 비롯한 비정규직이 대부분이었다. 책과 거리가 먼 듯한 그런 이들의 집에 어떻게 문학 잡지와 소설가 전집 같은 것들이 떡 하니 꽂혀 있었을까? 그 분들이 과연 읽었을까?
아이 방에 있는 참고서를 빼면 책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요즘 집들을 볼 때면 더욱 궁금증이 인다.
이한음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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