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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쌀쌀하면 더 생각나는 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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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쌀쌀하면 더 생각나는 김치찌개

입력
2008.10.3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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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바람 부는 계절이 오면, 헝가리인들이 떠올리는 메뉴는 '구야시(Gulyas)'. 소고기에 고추, 양파, 파프리카 등을 썰어 넣고 매콤하고 걸쭉하게 끓여내는 스프다. 헝가리 전통 음식이지만, 여기에 감자 등을 으깨 만두처럼 빚은 '뇨끼'를 넣거나 빵을 찍어 먹는 방법으로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도 즐겨 먹는다.

차가운 강바람을 뚫고 걷다가 초대받은 친구 집으로 들어서면, 자글자글 끓고 있는 구야시 냄새가 허기를 부른다. 이마에 땀이 솟도록 따끈한 수프를 먹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와인 한 잔을 마시다 보면 해가 일찍 떨어져 외로운 겨울날도 금방 지나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 김치찌개

김치찌개는 시간의 음식이다. 찌개의 중심을 이루는 김치가 우선 폭삭 익어야 맛있으니, 시작부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흔하고 오래 된 메뉴지만, 아무나 그 맛을 못 낸다. 김치찌개는 종류도 가지가지인데 김치 종류에 따라 다르고, 돼지 목살이나 참치처럼 추가로 넣는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엄마는 김치찌개용으로 호박김치를 종종 담그시는데, 잘 익은 누런 호박김치를 넣고 끓인 찌개는 세계 그 어떤 수프보다 맛이 부드럽다. 하얀 밥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박을 하나 건져 올리고 깨뜨려 밥과 함께 입에 넣으면, 밤밥이나 고구마밥과는 또 다른 달콤한 밥맛이 퍼진다. 양념으로 먼저 숙성된 호박이 일반 찐 호박과는 깊이가 다른 감칠맛을 낸다.

입맛 없을 때 주로 끓여내는 것은 '김치 전골'. 김치찌개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납작한 양수 팬에 끓여가며 천천히 먹을 수 있게 준비한다. 찌개보다 간을 간간히 하고, 마지막에는 떡이나 칼국수 등을 넣고 끓여 마무리할 수 있어서 손님 초대에도 인기 메뉴다.

각종 김치 끄트머리, 무, 대파머리, 다시마를 냄비에 한데 넣고 아침부터 푹 끓여 만든 육수를 연신 추가해 가며 먹으면 어른 서너 명이 밥 한 그릇씩 비우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김치찌개를 개인용 볼에 담아 한 덩어리씩 뭉친 밥과 서빙하면, 양식으로 차린 손님 초대의 마지막 코스로도 손색없다. 샐러드나 스테이크 등을 먹다가 볼에 스프처럼 담아 낸 김치찌개와 주먹밥 한 개씩 상에 올리면, "역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마무리해야 먹은 것 같죠."라고 이구동성, 반가워들 한다.

■ 단골집 김치찌개

으슬으슬 날이 춥고 때마침 감기 기운까지 돌면, 동네에 숨겨 둔 단골 찌개집이 절로 생각난다. 주부지만,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지쳐있을 때 나도 모르게 1,000원짜리 다섯 장 쥐고 슬렁슬렁 걸어간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벌써 끓고 있는 김치찌개 냄새가 나를 맞고. 컨디션이 안 좋거나 콧물 훌쩍일 때마다 몇 년째 밥을 얻어 먹는,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낯익은 주인 아주머니의 밥상을 받는다.

뚝배기에 금방 끓여 나온, 여태 끓고 있는 찌개는 얇은 양은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제맛! 세계 최고급 와인 잔을 만드는 '리델'사(社)의 컵이 좋은 이유가 너무나 얇은 크리스털로 만들기 때문에 그만큼 와인과 입술, 혀가 가깝게 닿아서라는데. 얇게 두드려 만든 양은 숟가락도 은수저나 나무 재질에 비해 숟가락 자체가 얇기 때문에 찌개의 뜨거운 온기를 아랫입술과 입안 전체에 더 잘 퍼뜨린다는 것이 나의 생각.

간이 딱 맞지만 짜지 않고, 배추가 익으며 생겨난 단맛이 나지만 절대 들큰하지 않으며, 돼지고기에서 우러난 얇은 기름이 살짝 낀 국물 한 입에 심신이 노곤하게 풀린다. 찌개 속 김치를 건져 입에 넣으면, 설겅하니 씹히면서도 질감이 살아 있다.

두부를 건져 먹어 본다. 국물 속에서 폭 익은 두부는 뜨겁고 부드럽다. 두부랑 김치랑 한데 잡고 왼손으로는 소주 한 잔 털어 넣어야 제맛이다.

"이모, 나는 왜 집에서 아무리 끓여도 이 맛이 안나?" 하면, "니는 둘이 먹을 만큼만 쪼매씩 끓이니까" 한다. "비법이 있는 거 아니고?" "그란 거 없다. 그냥 돼지고기에 묵힌 김치 여코, 물 여코 끓이는 거야 다 같제."

앗, 한 가지 비법을 캐내었다. 이모의 '김치 단지'. 작은 김치용 단지를 두고, 너무 시어버린 김치를 착착 모아가며 오래 묵힌다는 사실! 당장 나도 다용도실 한 켠에 작은 옹기를 두고 냉장고 속에서도 시어버린 김치를 모으기 시작한다. 마침 날씨도 추워졌으니 밖에 두어도 김치 냄새 진동할 일도 없고.

■ 축제 같은 맛

영동대교 남단에 큰 규모의 김치찌개 집이 있는데, 가게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날이 조금만 쌀쌀하면, 유리 너머로 보이는 식객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혼자 혹은 둘씩 앉아 식탁 위의 가스 불을 태워가며 찌개에 열중한다.

그 모습이 작은 축제처럼 보인다. 모두 신이 나 있고, 힘이 나 있고, 땀을 흘리며 멈추지 못하고 먹는다. 영문 모르고 구경하던 외국인이 찌개집 안으로 들어선다. 어떤 맛이기에 남녀노소가 저리 전투적으로 먹는가 싶었나 보다.

그 모습은 서대문 고가 아래 유명한 김치찌개 집에서도 볼 수 있다. 센스 없이 점심시간에 딱 맞춰 가면 자리도 구하기 힘든 집. 시큼한 맛이 돋보이는 묵은 김치 국물에 이 집의 특선 메뉴인 데친 내장을 한 접시 먹고 나면, 어질어질하다.

시큼한 국물에 비빈 밥을 급하게 꿀떡 넘기는 넥타이 부대들의 상기된 표정만 봐도, 김치찌개가 우리를 얼마나 흥분시키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종종 강화도에서 사다 먹는 순무 김치를 남겼다가 찌개에 넣는다. 순무 특유의 인삼같이 쌉쌀한 맛은 찌개를 전반적으로 달지 않게 만든다. 어떤 때에는 친정에서 얻어 온 깍두기를 넣기도 한다. 무맛이 우러나 좀 달달해진다.

직접 고른 배추로 정성껏 담근 김치를 독에 익혀 먹다가 시어지면, 다시 독에 모아가며 오래도록 삭혀 그것으로 찌개를 끓여 보고 싶다. 그 맛 하나만 제대로 내도, '요리사'라 불릴 자격이 있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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