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 역 광장에는 요즘 노숙자들이 부쩍 늘었다. 수십 명이 자정부터 모여들어 배낭 속에서 고단한 잠을 잔 후 다음날 새벽 6시 무렵 흩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10여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게 급증한 셈이다. 직장에서 내몰리거나 구직을 포기한 사람 등 여러 부류가 있을 것이다.
노숙자 급증은 경기가 침체국면으로 본격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현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감원, 명예퇴직 등 구조조정 쓰나미에 휩쓸린 사람들이 서울역과 지하철역에 몰려와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슬픈 이야기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전 세계에 감원 칼바람 쌩쌩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염되면서 감원과 해고 칼바람이 불고 있다. 위기의 진앙지 미국은 탐욕에 눈멀었다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금융회사는 물론 제조업에까지 해고 태풍이 불고 있다. 월가의 미꾸라지들인 헤지펀드 업계에서만 1만명이 보따리를 싸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에 합병되는 메릴린치도 1만명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GM 등 자동차 빅3, GE, 야후, 베스트바이 등 제조ㆍ유통업체를 가릴 없이 매출 부진과 투자 손실을 입으면서 공장 폐쇄, 감산, 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영국 독일도 금융분야에서 각각 6만명, 4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내년에 2,100만 명이 실직할 것이라는 우울한 보고서를 냈다. 세계 경기가 불황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R(Recession)의 공포'에 이어 'J(Jobless, 실업)의 공포'까지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실업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를 담보로 정부 지급보증을 받은 은행이 지점 통폐합 등 자구노력에 나설 경우 구조조정 한파가 불어 닥칠 것이다. 자동차 전자 철강 유화 등 제조업체들도 수출 감소 등의 직격탄을 맞아 감산과 사업 재편을 통해 살아남기 전쟁에 돌입했다.
감산은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로자들도 감원 공포에 떨고 있다. 자금난이 목까지 차오른 중소업체와 건설업계의 부도 도미노 폭탄까지 터지면 실업자는 급증할 것이다. 청년실업자가 14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실직자마저 쏟아지면 고실업 문제는 최대 화두가 될 것이다.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의 이중고는 시작에 불과하다. 경제관료들은 위기 극복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야구로 치면 2~3회 말을 지났을 뿐이다. 지금은 제2의 외환위기나 다름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외환위기가 재발하는 일은 결단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해외에서 달러를 빌리지 못한 채 하루짜리 외화 대출로 연명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금리 인하와 은행채 매입 등 초강력 카드를 내놨지만 돈맥경화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극복의 모범생으로 칭송 받았던 한국경제가 비싼 수업료를 내고 얻은 교훈을 망각하고 무분별한 외화차입 레이스를 되풀이하다가 다시금 위기를 맞은 것이다.
만연한 거품 빼는 계기 돼야
경제주체들은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눈높이를 낮추고, 허리띠도 졸라매야 한다. 사회에 만연한 거품도 이 참에 빼야 한다. 연초 달러 당 900원대에 머물던 원화환율이 지금처럼 1,400~1,500원의 고공행진을 벌인다면 1인당 국민소득(GDP)은 지난해 2만 달러에서 1만2,000~1만3,000달러 수준으로 고꾸라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민소득이 감소하는 만큼 경쟁국에 비해 높은 임금 땅값 집값 등 모든 부문의 거품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 보증으로 살아남은 은행의 대졸 초임 연봉이 4,000만원 대에 이르는 고임금은 대표적인 거품사례다.
민간에 비해 실직의 고통이 별로 없는 공무원과 공공부문도 고통 분담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청년들은 대기업만 선호하지 말고, 중소기업에서 일하겠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취업대란을 감안하면 일자리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경제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쳐 다시금 비상할 수 있도록 국민의식 개조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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