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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짐을 꾸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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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짐을 꾸리는 방식

입력
2008.10.3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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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두 달 정도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여행 삼아 다니기에는 다소 길고, 뭔가 배워 볼 심산으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기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도쿄에 머물면서 가 보지 않은 거리를 실컷 걷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두 달에 불과하고 거기다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떠나는 마음, 보내는 마음이 쓸쓸한지라 사람들과 가벼운 송별회 자리도 가졌다.

송별회가 끝나자 짐을 꾸릴 일만 남았다. 사람마다 짐을 꾸리는 방식이 달라서,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챙겨가지 못한 물건 때문에 불편할까 봐 이것저것 넉넉히 짐을 꾸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 쪽이었다. 현지에서 불편을 겪는 것보다는 고생스러워도 트렁크의 무게를 견디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먼저 꾸린 것은 책이었다. 어딜 가나 손에 책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성격 탓에 고심하며 두 달간 읽을 책을 골랐다. 몇 권은 우편으로 부쳐달라고 할 요량으로 빼 두었으나 당장 읽어야 할 책은 가져가야겠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하나 버릴 데 없어 시간을 들여 읽으려고 미뤄뒀던 미국의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의 자서전 <그 모든 낯선 시간들> 을 제일 먼저 챙겼다. 술술 읽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 소설을, 두꺼운 시집을, 더 이상 읽을 게 없을 때 볼 생각으로 이론서까지 챙겼다.

다음에는 카메라와 엠피쓰리, 전자사전 같은 기계류를 챙겼다. 사진도 잘 찍지 않고 음악도 잘 듣지 않고 사전도 잘 찾아보지 않지만 두 달 동안 그것들 없이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 챙겼다. 여행지에서 뭔가를 써 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노트북도 챙겼다. 간혹 놓치기 아까운 생각이 떠올라도 수첩에 간단히 메모해 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두 달은 뭔가를 쓰고 싶어졌을 때 무턱대고 참기에 다소 긴 기간이었다. 거기다 일본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별 걱정을 안 했지만, 부모님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한국에서도 두 달 넘게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먹을 거리를 챙겨 보내셨다.

떠날 무렵 한국은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기 시작했지만 도쿄는 낮 기온 20도를 오르내리는, 여전히 포근한 가을이었다. 게다가 연말이나 되어야 돌아올 터이니 아무리 도쿄가 서울보다 따뜻하다고 해도 추위를 잘 타는 나로서는 제법 두툼한 겨울옷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꾸려야 할 짐에는 두 계절의 옷이 뒤섞였다. 마지막으로 망설이다가 책상 앞에 늘 두고 보는 작은 나무 생쥐 인형까지 챙겼다.

짐은 이미 수하물 허용 범위를 넘어 버렸다. 트렁크에 다 들어갈 리 없고 간신히 넣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들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가구와 가전제품만 빠졌달 뿐, 거의 이삿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짐을 보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 자신이 여행지에서의 사소한 불편도 참기 싫어할 만큼 까탈스럽고 자잘한 생활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제껏 넉넉히 많이 가진 것만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무게 같은 것은 미처 느끼지 못했다. 두 달 간의 짐을 꾸리면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널려진 짐 중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간추리기 시작했다. 덜어낸다고 생각하니 없어도 좋을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쩌면 현지에서 조달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겠지만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니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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