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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31> 대국민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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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31> 대국민 계약

입력
2008.10.29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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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의원 시절 주변의 공화당 동료 의원들이 늘 하던 말이 있다. "민주당이 40년 동안을 다수당으로 행패를 부려도 우리는 멍하니 쳐다봐야만 하니 의원 할 기분이 안 난다"는 불평이었다.

미국 의회제도는 대한민국과는 달라서 여당이 모든 권한을 독차지하게 돼 있다. 예를 들면, 국회의장부터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심지어 소위원회 위원장까지 여당이 모두 차지하게 돼 있다. 대한민국 국회처럼 나눠 갖는 방식은 전혀 없다.

조지아주 출신 뉴트 깅리치가 의원총회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 대표 (Minority Leader)로 당선되자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다음 선거에 승리해 공화당을 여당으로 만드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기로 결정했다. 깅리치는 우선 남부 주에 흩어져 있는, 저 유명한 남부 민주당 의원(Southern Democrats)을 일 대 일로 접촉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전통적으로 남부 민주당 의원들은 비록 민주당에 몸을 담고는 있어도 투표 때 보면 항상 공화당 편을 들어왔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정치철학은 공화당과 더 흡사하기 때문에 어떤 명분만 주면 공화당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많다는 게 깅리치의 판단이었다.

사실 남부의 주들은 남북전쟁 때 초토화된 이래 오랫동안 경제회복을 못해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전락해 있었고, 그래서 링컨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깊었다. 링컨이 공화당을 창당, 공화당의 창시자가 되면서 남쪽 의원은 모두 그 때부터 반대당인 민주당에 합세해왔다. 자연히 민주당 소속이 아니면 정치생명을 지탱할 수 없었기에 남부 주에선 민주당 지지자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북부에 대한 반감, 링컨에 대한 반감은 차차 사라졌고 남북전쟁이 끝난 지14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반감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오히려 미국의 성조기 아래 미 합중국에 대한 충성심은 북부보다 더 강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깅리치의 노력으로 남부 민주당 의원들의 마음이 하나 둘씩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 10여명이 민주당 탈당을 선언하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 커다란 혁명이었다. 의사당 안에선 며칠에 한번씩 공화당에 입당한 새로운 민주당 의원들을 환영하는 리셉션이 열렸고 나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공화당은 1949년부터 1995년까지 46년 동안 야당생활을 했다. 내가 46년 동안의 야당 의정생활에서 무엇을 주로 했는지 물어봤더니 민주당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하다가 지치면 의원 생활을 그만 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이제야말로 여당이 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깅리치를 중심으로 단단히 단합하고 인기가 없는 현역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를 목표로 선거자금을 퍼붓는 방법 등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230대204, 26석 차이로 46년 만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사를 뒤바꿔 놓은 우리 공화당 의원들은 서로를 칭찬하며 며칠 동안 축제를 계속했다.

공화당이 승리한 선거가 치러진 때가 바로1994년11월 첫째 화요일이었다. 이 선거의 승리로 공화당은 1995년초 마침내 다수당으로 등원할 수 있었다. 내가 103대 국회에 들어갔을 때는 176대258로 무려 82석이나 민주당이 의원수에서 압도했었으나 그 다음 104대 국회에선 깅리치의 지도력으로 거꾸로 230대204, 26석 차이로 공화당이 다수당으로 변한 것이다.

깅리치의 지도력과 명철한 판단력으로 공화당이 46년 만에 다수당이 되면서 깅리치는 하원의장에 당선됐다. 그로부터 공화당은 모든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 위원장직을 독점하는 등 갑작스러운 권력의 집중을 경험하면서 완전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나도 건설교통 소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비로소 매번 반대 주장만 해 온 공화당이 미국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민주당의 반대에 다수 표로 밀어붙이기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전격적이고도 압도적인 공화당의 승리는, 물론 깅리치의 지도력도 주효했지만 국민들의 성향이 보수로 바뀐 덕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이른바 대국민 계약(Contract with America) 법안이었다. 이는 만일 공화당을 여당으로 선택해주었을 경우, 미국 국민들에게 100일 만에 통과시키기로 약속한 10개 법안이었다. 이 계약은 국회의사당 앞 계단에서 공화당 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됐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공화당을 여당으로 만든 이 계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회는 국가예산의 적자를 막는다.

둘째, 범죄를 없애고 감옥을 증축하며 경찰과 사형제도를 강화한다.

셋째, 정부로부터 받는 재정 지원은 2년으로 마감한다.

넷째, 세금제도를 고쳐 고아들을 키우는 가정?위해 세금 삭감제도를 채택한다.

다섯째, 결혼한 부부의 세금을 삭감한다.

여섯째, 국방비를 늘리고 미군을 유엔 지휘 하에 두지 않는다.

일곱째, 노인들이 받는 연금에 대한 세금을 전부 삭제한다.

여덟째, 중소기업을 돕는다.

아홉째, 쓸데없는 법정 소송을 없앤다.

열째, 미 연방 의원의 임기를 제한한다.

1월4일 의회가 개회한 날로부터 100일안에 10 개의 중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들 법안 통과를 위해 새벽 1시, 어떤 때는 밤을 새워 가며 각 분과위원회의 심의를 계속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해내고 말았다. 민주당 의원들의 불 같은 반대와 불평 속에서도 기어코 성공시길 수 있었던 데는 역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도움도 작용했다.

야당도 여당의 법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 법안이 옳고,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이 생기면 민주당에선 당 차원에서의 반대를 접고 각각 개개 의원의 판단에 맡긴다는 입장을 밝혔다.

때문에 특히, 세금제도 개정안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밤새도록 의회가 계속될 때면 나는 사무실 소파에 누워 틈틈이 새우잠을 자다가 투표한다는 벨이 울리면 졸음을 참고 의사당에 들어가 투표를 했다.

밤에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뜨거운 물에 데워 먹었다. 몇 달을 계속 밤마다 라면을 먹은 탓인지 체중은 늘었고 대신 라면의 진짜 맛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게 큰 바람이었다고 했더니, '쌀밥 대신 라면을 끓여 드시지 왜 그랬냐'는 물음이 이어져 어이 없어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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