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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 137명 정부 초청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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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 137명 정부 초청 나들이

입력
2008.10.29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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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7시 서울 잠실동 롯데호텔 사파이어볼룸. 흥겨운 난타 리듬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년의 노신사들이 박수를 치며 잔뜩 들떠 있었다. 자리를 함께 한 김공부(75)씨는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1965년 3월18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낯선 독일행 비행기에 처음 몸을 실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가난은 그에게 '천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김씨는 전남 여수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5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촉망받는 수재였다. 대학 입학은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다는 행복을 선물했다.

그러나 소박한 기쁨도 찰나였다. 우체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정년 퇴직을 하자, 그는 졸지에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하는 집안의 가장이 됐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학업의 끈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결국 2학년만 마치고 중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밥벌이는 쉽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젖먹이 아들 둘까지 생긴 터였다. 막노동, 가정교사를 전전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영어를 잘한다는 소문에 서울 워커힐 호텔에 잠시 몸도 담았다.

하지만 서울 성북동의 판잣촌 생활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해외 광부 모집 공고'를 접했다. 그에게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렇게 독일로 떠났다.

광부의 삶은 쉽지 않았다. 120명의 동료와 함께 독일 아헨의 탄광에서 하루 9~10시간씩 죽기살기로 일했다. 휴일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씨는 "지하 600m 갱도의 40도에 달하는 열기와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지주목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피땀으로 번 월 650마르크의 돈은 고국의 가족에게 그대로 송금됐다. 당시 논 2마지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자신은 감자를 깎아 번 부수입으로 연명했지만 가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고통도 어느새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일하는 도중 틈틈이 배웠던 독일어가 체류 2년을 넘기면서 능통해졌고, 그를 눈여겨 본 아헨지역 광산본부 관계자가 어느날 불렀다. 300명의 본부 직원 중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정식 직원으로 특채한 것이다. 김씨는 "한국인 근로자의 힘겨운 삶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느낀 사명감 때문에 지금까지 독일을 떠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60~70년대 김씨처럼 이역만리 타향에서 탄가루를 들이마시며 조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졌던 파독 광산근로자 137명이 노동부의 공식 초청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다음 달 2일까지 광양제철소, 울산 현대중공업 등을 둘러보며 조국의 산업 발전상을 직접 확인할 계획이다. 이날 환영만찬에는 이영희 노동부 장관을 비롯, 당시 독일에 파견돼 광부들과 고락을 함께한 역대 독일대사관 노무관들도 참석해 감격의 재회를 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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