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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동평리 주민들 '토지 강제수용' 반발 憲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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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동평리 주민들 '토지 강제수용' 반발 憲訴

입력
2008.10.29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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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경기 안성시 동평리 동양마을. 주로 벼농사와 한우 사육이 생업인 76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뒤로 제법 높다란 능선이 이어지는 산이 있고 가옥과 농토가 산 어귀부터 중턱까지 들어선 전형적인 배산(背山) 입지다.

이 한갓진 동네가 올 초부터 술렁대고 있다. 마을 뒷산 중턱에 축구장 23배 규모(16만3,600㎡)로 회원제 18홀ㆍ퍼블릭 9홀의 골프장이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이 진행된 지 벌써 8개월째, 산 중턱은 이미 황토가 드러나 있다. 왼편의 몇몇 가옥들과 오른편의 미술관은 공사장 바로 턱밑에 있어 위태로워 보였다.

27일 오후 마을로 들어서니 뒷산 중턱에서 대여섯 대의 포클레인이 땅을 고르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장영순 할머니는 "평생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에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놀란 가슴을 움켜쥔다"고 대뜸 쇳소리를 냈다. 공사 초기엔 소음에 놀라 날뛰던 소가 울타리에 목이 끼어 죽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출입이 통제된 공사장 목전까지 올라가 보니 한 겹짜리 철제 울타리 외엔 마땅한 사방(沙防) 시설이 없다. 게다가 토질은 한눈에도 까슬까슬한 모래다. 파헤쳐지면서 응집력이 약해진 흙이 한꺼번에 흘러내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다. 실제 1988년과 91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이웃 두 명을 잃은 터라 주민들은 더욱 불안하다.

이 통에 어머니를 잃은 안창호씨는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비만 오면 집 앞 도랑에 뻘건 흙탕물이 흘러내린다"며 "온 가족이 모래더미에 파묻혔던 일이 다시 일어날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농부들에겐 당최 득 될 게 없어 보이건만, 동평리 골프장은 엄연히 '공익시설'이란다. 올해 3월 개정된 국토계획법은 도시계획 기반시설에 '체육시설'을 추가했고, 경기도와 안성시는 이 골프장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덕분에 시행사는 사업 부지의 80%를 협의 매수해 착공 요건을 갖췄고, 남은 부지에 대해 강제수용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민들은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이다. 한 주민은 "통계를 보니까 골프 치는 사람이 인구의 2%도 안되더라"며 "개인 입회금이 9억~10억 원에 달하는 회원제 골프장이 공익시설이면 공익시설 아닌 게 어디 있겠나"라고 비꼬았다.

이택순씨는 "골프장에선 개장하면 주민을 우선 채용한다고 했지만,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거니와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어서 쓸모 없는 제안일 뿐"이라고 말했다.

2년 전 지은 집이 골프장에 포함된 박광학씨를 비롯해 현재 여섯 가구가 집 내놓기를 거부하고 있다. 박씨는 "행복추구권이 있는 민주국가에서 공익사업이란 미명 하에 강제수용을 가능하게 한 것은 모순"이라며 "회사 측이 제시한 감정가로는 어디서도 살 집을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종태씨처럼 "조상 묘를 함부로 옮길 수 없다"며 버티는 주민도 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농민들은 "내년 말 골프장이 완공되고 나서가 더 문제"라고 말한다. 특히 농약과 화학 비료를 안 쓰는 친환경 농법으로 안성시로부터 유기농 인증까지 획득한 몇몇 농가들의 한숨은 더 깊다.

어둑해진 저녁, 콤바인(추수용 농기계)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 주민에게 골프장 얘기를 꺼내자 "개장 후 농약이 날아들기 시작하면 누가 유기농 작물이라고 인정해 주겠냐"고 하소연했다.

최장섭씨는 "벌써부터 농산물검사소에서 유기농 인증을 취소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쌀농사가 수입의 전부인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소 키우는 농가의 농약 걱정도 이에 못지않다.

급기야 마을 주민 18명이 바쁜 일손을 잠시 털고 28일 헌법재판소를 찾아 상경했다. 골프장 부지 강제매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국토계획법 일부 조항이 헌법상 재산권ㆍ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낸 청구한 것이다. 이에 앞서 주민들이 제기한 행정소송과 위헌법률심판 제청은 모두 기각됐다.

헌재 정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장영순 할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공기가 좋아 암 환자가 요양하러 오고, 고라니가 찾아와 노는 동네에 농약 냄새가 날리도록 골프장 허가를 내주다니 말이 되는 겁니까?" 그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안성=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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