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가을, 극단 취성좌(聚星座ㆍ후에 조선연극사로 개칭)의 공연이 열리던 서울 종로의 단성사. 공연 중간 소위 '막간(幕間) 무대'에 앳된 모습의 여가수가 등장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나라 잃은 설움을 에둘러 표현한 구슬픈 곡조의 노래는 이내 객석을 뒤흔들었다. 숨죽인 흐느낌은 어느새 통곡으로 번졌고, 가수도 목이 메어 '노래 반, 울음 반'의 무대가 이어졌다. 놀란 일제 순사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중단시켰고, 작사가 왕평, 작곡가 전수린을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이 종로경찰서로 붙들려 가 밤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이자 80년 지난 지금도 국민 애창곡으로 사랑 받는 '황성옛터'(발표 당시 '荒城의 跡')는 그렇게 대중에 첫 선을 보였다. 당시 노래를 부른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의 나이는 불과 열 여덟이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춰 이미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던 이애리수(98) 여사가 정정하게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경기 일산 백석마을의 한 요양원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녀는 맏아들 배두영(71)씨와 딸들, 외손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느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돌보는 간병사는 "하루 세 끼 죽을 드시는데 한 그릇씩 모두 비운다"고 귀뜸했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뵈러 왔다"는 아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황성옛터' 부르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몰라"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닫았다. 워낙 고령이라 대화가 어렵기도 했지만, 옛 추억을 마음대로 떠올릴 수 없는 아픔을 지닌 탓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으로 9세 때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막간 가수로 활동했다. 빼어난 노래솜씨와 미모로 인기가 있었던 그녀는 '황성옛터'를 통해 일약 '국민 가수'로 떠올랐다.
1932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지금의 인구비례로 따지면 500만장 정도이니,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레코드 업계에 '조선 유행가 취입 붐'까지 몰고 왔던 그녀의 삶은 22세 때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재학생 배동필씨를 만나며 격랑에 휩싸였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부친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그녀가 가수 출신임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부의 연을 허락했다.
그 후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2남7녀를 낳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에만 충실했다. 과거와 독하게 인연을 끊고는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 맏아들조차도 "어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대학(연세대) 다닐 때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하며 500여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달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당의사가 "본인이 일부러 식음을 끊지 않는 한 110세까지 충분히 사시겠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또 1년 전부터 무슨 연유인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있다고 한다.
'황성옛터'가 세상에 나온 지 꼭 80년이 지난 2008년 가을, 사랑을 좇아 화려했던 과거를 미련 없이 버린 채 그 긴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전설 속 여가수와의 만남은 만감을 불러 일으켰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얼굴을 돌려 말없이 쳐다보던 커다란 두 눈이 가슴에 와 박혔다.
글=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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