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고."
감독 데뷔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제작사인 김기영 감독님의 신한영화사가 부도가 났다. 이어서 <서울의 달빛 0장> 의 원작자 김승옥 형이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여관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종교에 몰두해서인지 1년 6개월이 되어도 1페이지도 못 쓰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곁에서 내가 쓰기 시작하였다. 시나리오를 들고 몇몇 영화사에 찾아 다녔으나 퇴짜였다. 서울의>
마침 조해일의 신문연재소설 <엑스> 가 출판되었다. 6.25 전란으로 인한 전후세대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전쟁고아인 남자주인공은 대학 강사를 하며 콜 보이 생활을 전전하고, 일류 대학생인 여 주인공은 양공주의 딸이라는 출신이 약혼자 가정에 알려져 파혼당하고 비밀요정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한다. 조해일 씨는 두 주인공의 비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고 그것을 제목 'X'로 상징화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 주인공의 마지막 자살을 의미하는 'X'를 '구원'으로 풀었다. 모두들 우려가 높았다. 제목 그대로 흥행이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엑스>
집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초고를 1 주일 밤을 꼬박 새우며 끝냈다. 그 후, 6개월 동안 수 없는 날을 새우며 무려 30고를 써냈다. 시나리오를 들고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찾아갔다. 곽사장 역시 흥행에 자신을 하지 못 했다. 손해가 나면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곧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촬영과 조명은 하길종 감독과 콤비였던 유영길 촬영감독과 강광호 조명감독으로 결정했다. 남주인공 역엔, 형이 데뷔시킨 <바보들의 행진> 의 주인공 하재영으로 결정했다. 여주인공 역엔 막 여고를 졸업하여 데뷔 준비 중인 강문영과 갓 데뷔한 이미숙이 후보로 올랐다. 강문영의 첫 인상은 매우 양순하고 예뻤다. 이미숙은 달랐다. 아마도 TV데뷔작품 <장희빈> 에서의 드센 이미지와 첫 영화 현장에서의 악평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주변의 의견과는 다르게 나는 이미숙을 선택했다. 순한 말보다 거센 말을 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장희빈> 바보들의>
첫 촬영 장소는 남산의 아름다운 숲길로 정했다. 1965년, 우연히 친구를 따라왔다가 배우가 되어 평생을 영화를 하게 된 그곳 남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산책로. 카메라가 높은 크레인 위에서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남산의 산책로를 걷고 있는 하재영을 잡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의 첫 '레이디, 카메라, 액션!'이 고요한 아침 남산을 울렸다. 1967년, 남산 KBS-TV 방송국에서 첫 주인공역을 맡고 너무 기뻐 달려와 소리치던 그 곳에서, 15년 후 영화감독이 되어 돌아와 소리치는 '나의 외침'에는 나만이 느끼는 전율이 있었다. 첫 컷을 OK한 나에게 유영길 촬영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하감독, 레디 꼬가 영화 100편은 감독한 사람 같애."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배우 100편이면 현장 100편 아닙니까." 스탭과의 호흡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여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미숙이 숙제였다. 그녀는 촬영 첫 날부터 2시간 늦게 현장에 도착하였다. 제작부와 연출부가 몸이 달아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그녀 촬영 분을 준비하느라 수선을 떨었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간단히 받고 종일 그녀를 한 컷도 찍지 않았다. 일몰이 되자 촬영을 마쳤다. 제작부와 연출부가 그녀의 스케줄이 없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 2회 차 촬영 날이었다. 그녀가 1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종일 그녀를 1컷만 찍었다. 3회 차 촬영 날, 그녀가 30분 전에 현장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2일간 못 찍은 그녀의 분량을 모두 찍었다. 그녀는 이후, 집합시간 전 스탭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집실을 찾아왔다. 촬영한 필름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바다와 물고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수영을 즐겼다. 그녀는 수영을 더 잘 할 수 있게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내 두 아들과 그녀에게 수영선생을 소개하여 함께 수영을 배우게 하였다. 그녀는 우리 가족처럼 되었다. 편집실을 우리 집으로 옮기자 그녀는 자기 집 드나들 듯 일이 끝나면 달려와 밤새도록 편집하는 곁에서 식구들과 지냈다.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조감독과 제작부가 긴장하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번 영화에서 그녀가 브래지어 끈도 안 내렸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적막만 흘렀다. 욕실에서 조감독이 달려왔다. "라이트, 카메라 셋업 되었습니다. 이미숙씨도 욕실에 들어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욕실 안은 캄캄했다. 카메라 뒤 촬영감독과 조명기기 뒤로 조명감독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준비 됐으면 라이트 켜라고 지시하였다. 라이트가 켜지는 순간, 사람들의 입과 눈이 벌어진 채 숨이 정지되고 말았다. 이미숙이 욕조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감독님, 됐죠. 어서 찍어요." 나는 순간 아찔하였다. "라이트 꺼." 모두들 달려 나왔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어 그녀가 웃으며 나를 불렀다. "감독님, 목욕할 때 옷 입고 하세요? 찍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찍으세요." 비로소 웃음이 나왔다. 그녀를 달래며 다 찍고 싶어도 검열에 잘려서 볼 수도 없으니 가능한 부분만 찍자며 타월로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소문이 충무로를 강타했다. 제일 먼저 배창호 감독이 달려왔다. <고래사냥> 의 캐스팅을 하고 있는데 이미숙의 '감당할 수 없는 배우'라는 소문과 '영화에 완전 미친 배우'라는 두 '설' 중 어느 것이 진짜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영화에 대한 정열은 감독하기에 달렸다며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재주꾼인 배감독이 그녀를 '녹여' 캐스팅에 성공했다. 고래사냥>
나는 첫 감독 작품의 제작을 길종 형의 첫 작품 <화분> 제작 시 곁에서 도왔던 아내에게 맡겼다. 외국영화계에서 부부가 함께 영화를 하는 모습이 늘 부러웠다. 가정에서도 영화가 화두가 되면 더 좋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에게도 영화에 대하여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10세와 7세의 두 아들을 영화에 출연시켰다. 내가 서재에서 16MM 영사기를 돌리며 편집하는 동안 두 아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름을 감고 자르고 붙였다. 그들이 자라서 영화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길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너희의 확실한 운명인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결혼하여 자식도 낳은 큰 아들 상원은 영화하는 것이 살기에 몹시 힘들다고 가끔 푸념도 한다. 결혼을 앞둔 준원은 내년 초 "레이디, 고!" 준비를 위해 바쁘다. 화분>
나의 첫 감독 작품은 주위의 우려대로 흥행에 참패 했다. 나는 많은 배우와 스탭에게 아쉬움을 주었다. 심사위원장은 '당신은 다시는 이렇게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코멘트했다. 한 손에 잡힌 대종상 신인 감독상 트로피가 겨우 나의 감독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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