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T 리첼슨 지음ㆍ박중서 옮김/까치 발행ㆍ560쪽ㆍ2만원
스파이. 이 단어는 깃 세운 트렌치코트와 선글라스, 그리고 축축한 뒷골목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고독과 우수가 느껴지는 로맨티스트의 어둑한 뒷모습. 이 책은, 아쉽게도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스릴러의 속도감과 추리소설의 재미를 기대한다면 책장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다. 500쪽이 훌쩍 넘는 분량에 19세기 끝무렵부터 1990년대까지 스파이와 관련한 한 세기의 '사실'을 담았다. 약간의 인내력을 요구하는 책은 20세기의 '그림자'를 건조하게 서술한 역사서에 가깝다.
미국의 국가안보문서보관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는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20세기 스파이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책은 마치 백과사전처럼 표제어와 표제어로 촘촘히 짜여 있다. 체카(러시아 볼셰비키 첩보조직ㆍ67쪽), 앤스로포이드 작전(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의 비밀작전ㆍ192쪽), 코로나(CIA의 정찰위성 개발계획ㆍ364쪽) 등이 그 표제어다.
이 낱말들은 곧 20세기라는 거대한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조각이다. 명분과 이데올로기 뒤에서, 실제 세계가 어떻게 작동됐는지 그 조각들은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것들로 모자이크를 짜 맞추며 20세기의 맥을 짚어보는 게 이 책을 읽는 진짜 흥미다.
저자는 박진감을 부풀리는 수식어 대신, 정밀한 수치와 세세한 디테일로 스파이 세계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시드니 라일리, 허버트 야들리, 킴 필비, 제임스 앵글턴 등 유명 스파이와 망명자들의 삶을 소개하고, 과학기술과 스파이의 역사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1939년까지, 2차 세계대전, 냉전시대와 그 이후 등 시대 순에 따라 각 시기의 첩보활동을 집성한 것은 이 책에 '스파이의 교과서'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장점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3부의 마지막에 수록된 현대 첩보전의 모습. 저자가 '새로운 무질서의 세계'라고 명명한 탈냉전 시대에 이뤄지는 첩보 전쟁의 현장이다. 세계화와 '테러와의 전쟁'의 표피 아래서 실제로 작동하는 권력의 물리법칙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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