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8시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정문 앞.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 30여명이 참석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주노총 산하 서울지부 기륭전자 분회 소속 조합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4년째 농성을 벌이는 현장이다. 2005년 7월5일 시작된 농성은 이날로 1,156일을 이어가며 어느새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간혹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격한 구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조합원, 진보신당 등 정당관계자, 청소년들이 함께한 문화제는 시종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전날 상황은 정반대였다. 10m 높이의 철제구조물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이던 조합원들은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 끝에 전원 연행됐다. 농성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 갈데까지 간 노사
방송통신 기기 제조업체인 기륭전자 사태의 시발점은 2005년. 당시 인력파견업체에서 고용된 파견직 노동자 70여명은 비정규직 노조 설립과 함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그 해 9월 파견 회사가 농성 중인 조합원 32명에 대해 해고 통보를 하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10월에는 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을 실시, 정규직과 파견직이 '혼재'근무를 하고 있다며 불법 파견 판정을 내리자 기륭전자는 생산라인을 완전 도급 형태로 바꿨다. 그러나 노조가 도급직 전환에 반발해 투쟁을 지속하면서 80여 차례의 교섭과 결렬을 반복하는 지리한 싸움으로 번졌다.
노사간 벼랑 끝 대치는 양측에 막대한 상처를 남겼다. 2004년 1,711억원에 달했던 매출은 지난해 4분의 1수준으로 격감했고, 회사측은 결국 지난해 10월 전 생산 라인을 중국 쑤저우(蘇州)로 옮겼다.
25일에는 120여명의 연구ㆍ영업직 직원들만 남은 본사가 신대방동으로 이전한다. 노조 역시 장기간 이어진 노숙과 반복된 단식 투쟁 탓에 한계 상황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9월 극한 투쟁을 견디지 못한 조합원 권모(46ㆍ여)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 최대 쟁점은 정규직 전환
기륭전자 사태의 핵심은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노사 갈등이다. 사측은 12일 '끝장' 교섭을 마지막으로 협상 중단을 선언한 상태다. 특히 일부 조합원들이 22일부터 매출의 90% 가량을 의존하고 있는 미국 시리우스사 앞에서 원정 시위를 강행하자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최대 쟁점은 고용 형태와 복직 인원으로 요약된다. 노조는 기륭전자가 법적 책임을 지는 자회사를 통해 복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사측은 하도급 형태의 '제3의 회사'를 만들어 1,2년간의 근로 성과를 지켜본 뒤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복직 인원의 경우 32명의 조합원 중 복직 희망자 22명의 고용을 요구하는 노조와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10명이상은 안 된다는 회사의 견해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기륭전자 관계자는 "기껏해야 6~7개월을 일하고 3년 동안 투쟁을 했으니 정규직으로 받아달라고 하는 주장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노조 김소연(39ㆍ여) 분회장은 "어차피 자회사로 전환할 예정이면서 굳이 복잡한 절차를 들먹이는 것은 경영 성과를 빌미로 합법적으로 해고를 하겠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
■ 손 놓은 노동부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데에는 주무 부처인 노동부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 부재도 한 몫 했다. 노동부가 기륭전자 사태와 관련해 내놓은 해결책이라곤 30여 차례의 노사 교섭을 주선한 게 전부다.
특히 6월 노조가 제기한 부당해고 소송에 대해 사측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이후에는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다. 노동부 노사갈등대책과 관계자는 "법적 분쟁도 끝난 마당에 정부가 거간꾼을 자처하며 '감놔라 배놔라' 압력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노동부의 이 같은 방관자적인 태도가 오히려 해법 모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8월 노사협상을 중재했던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엄연히 분쟁이 지속되고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해결이 요원한 사안인데 정부가 팔짱을 끼고 있다는 자체가 직무유기"라며 "사측의 불법파견이 입증될 경우 정규직으로 바로 간주하는 조치와 같은 즉각적인 구제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