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7일 서울중앙지법 524호 법정에서 열린 네티즌 광고중단운동 사건 공판준비기일. 검사가 증거목록을 낭독하는 데에만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수백 건이 넘는 증거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은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치게 했다.
이미 문서로 제출됐기 때문에 판사도, 변호사도, 피고인도 검사가 읽는 동안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장시간 동안 목록을 읽어내려 간 것은 형사재판에 공판중심주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원칙적으로 증거목록을 모두 낭독하도록 돼 있기 때문.
이 사건의 경우 이런 과정을 위해 공판준비기일만 총 4차례나 진행됐다. 공판준비기일은 정식 재판에 앞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이 재판의 쟁점을 정리하고 증거조사방법 등을 논의하는 절차이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의 권고에 기초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라 올해 초부터 공판중심주의가 본격 시행되고 있지만, '선택과 집중'의 묘를 살리지 못해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재판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기계적 형식주의가 문제로 지적된다. 거의 모든 형사공판에서 검사는 "검찰에서 ~라고 진술한 것 맞지요?"라는 질문을 1~2시간 가까이 진행하고, 피고인은 그에 대해 "네,네"라는 답변 밖에는 하지 않았다.
수사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이나 수사내용을 뒤집을 만한 증거들을 찾자는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와 달리, 대부분의 공판에서 피고인과 증인 심문이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게 수사내용을 되풀이 확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조정철 공판1부장은 "수사기관에서 조사한 걸 또 재판에서 다시 하고, 이중으로 일 처리를 하다 보니 효율성은 떨어지고 시간은 많이 걸린다. 재판이 늘어져 기일을 몇 주 후에야 다시 잡고,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사건 공판을 하게 되다 보니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법정 위증 사범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진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서구에 비해 법정에서의 위증을 중대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풍토가 커서 공판중심주의가 자리 잡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 802건이던 위증죄 기소 건수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 지난해 1,638건으로 4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증 사범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관대한 편이다. 지난 5년 간 위증 사범의 실형 선고율은 평균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박 의원은 "공판중심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위증 사범에 대한 엄중한 단속과 처벌을 통해 위증죄가 중대한 범죄에 해당한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사법방해죄를 도입해야 하고 위증죄의 처벌수준을 무고죄와 같게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철 공판1부장은 "시스템적으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하니까 여러 애로가 발생한다"며 "검사, 판사, 재판정 수도 확충하지 않은 채 공판중심주의를 시행하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의 원칙인 신속한 심리와 선고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모든 여건이 완벽해질 때에 공판중심주의를 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공판중심주의의 방향이 옳은 이상, 현재로서는 판사가 최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고 효율을 높이도록 운용의 묘를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권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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