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말까지 수도권 4곳과 대전에서 공연되는 중국 국립발레단의 '홍등'을 보았다. '홍등'은 장이머우 감독의 동명 영화(1991)를 무용극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런데 달랐다.
영화는 넷째 마님의 시각인데 여기서는 셋째가 주인공이다. 영화와 무용극 모두 셋째 마님이 부정을 저질렀다가 죽임을 당하는 걸 보면 동일 인물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도 않다. 본인이 경극 가수 출신이고 주치의와 눈이 맞는 영화와 달리 무용극에서는 셋째 부인의 옛 애인이 경극 가수이니 말이다.
자금성의 '투란도트'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진시황제',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 등으로 장이머우는 뛰어난 시각적인 아이디어를 앞세운 연출가라 생각하기 쉽지만 '홍등'을 보니 과연 메시지 전달에도 탁월한 존재다.
공연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이 무용극의 등장인물은 영화 속 주인공의 변형이 아니라 봉건제도의 관습 속에서 희생된 또 다른 젊은이들을 그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가 마무리될 때 새로운 비극을 잉태한 작은마님이 시집 오듯 말이다.
장이머우의 연출은 이제 눈에 익었음에도 여전히 창의적이었다. 초야에 권위적인 신랑에 반항하던 여인이 종이막을 찢고 뛰쳐나온 순간 그 효과에 놀라지 않은 관객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몽둥이로 맞아 죽어가는 장면에서 그 핏빛이 하얀 벽을 물들이는 것도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그러나 '홍등'은 드라마로서의 연출이 빛났을 뿐 무용극으로서는 범작이었다. 그런데도 왜 세계 공연장을 누비고 있단 말인가?
'홍등'에는 영화로 세계인에게 친숙한 드라마가 있었다. 또 이를 무용극으로 구성한 좋은 대본이 있었다. 내용도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20세기에도 엄존했던 중국의 지독하게도 어두운 사회상에 대한 폭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창작 발레나 오페라는 왜 국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해외에서도 호기심 이상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일까? '홍등'을 보면 상당한 답이 나온다.
우선 좋은 우리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심청이나 춘향처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모든 게 잘 해결되는 해피엔딩의 고전에서만 찾을 게 아니라 뮤지컬 '명성황후'처럼 비극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소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대본화하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중국 국립발레단이 아무리 서양 무용수 이상의 체격과 테크닉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해도 극적인 표현력은 우리나라 일급 발레단보다 떨어진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 아닐까?
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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