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논현동 고시원 살해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는 21일 피의자 정모(30)씨로부터 "영화 '달콤한 인생'을 본 뒤 범행도구를 준비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이날 정씨에 대해 살인 및 현주건조물 방화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정씨가 평소 공포물,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데 '달콤한 인생'이라는 한국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멋있다고 생각해 범행도구를 준비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영화 '달콤한 인생'은 주인공이 보스와 조직을 상대로 목숨을 건 전쟁을 하는 내용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와 관련, 정씨는 "어릴 적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많이 당했다"며 "심적 고통이 커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고 범행도구를 준비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경찰의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씨의 정확한 범행동기와 범행 준비 과정, 기괴한 복장 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한편, 이날 실시된 부검에서 이월자(50ㆍ여)씨 시신에서 칼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가 20~30군데나 발견되는 등 정씨가 희생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1. 진짜 범행 동기는 뭔가
경찰은 브리핑에서 금전적인 압박과 어렸을 적의 열등감을 범행의 주된 원인으로 추정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8월 음식점 배달일을 그만둬 금전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두 달치 밀린 고시원 월세 34만원과 휴대폰 사용료 미납분 60여 만원, 예비군훈련 불참에 따른 벌금 150만원이 부담이 됐다. 여기에 하지정맥류를 앓아 치료비 300만원도 필요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정씨는 2002년 7월 제대후 불규칙적으로 주차요원과 배달을 하면서 월수입 120만~130만원 정도를 벌었다. 한두 달 쉬는 것이 정씨에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정씨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는 박모(52)씨는 "논현동 음식점에서 일하겠다는 의사만 밝히면 한달 월급 정도를 선불로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받은 핍박과 무시가 수십 년이 지난 후 갑자기 끔찍한 범행으로 연결된 데 대한 설명도 석연치 않다.
2. 범행준비를 4년동안 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2004년 3월 가스총을 구입하고 다음해 과도와 회칼을 구입하는 등 범행도구를 준비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인 20일 새벽 5시에 순간적으로 범행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설명대로라면 범행준비는 4년에 걸쳐 치밀하게 했지만 실행은 우발적으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4년동안 준비한 범행을 20일 실행에 옮겼는지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부족하다. 따라서 최근 정씨의 행적과 통화 상대자 등에 대해 좀더 면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 4년 동안 저지른 범죄나 미수에 그친 범죄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3. 기괴한 복장은 무슨 의미인가
정씨는 범행당시 검은 모자와 검은 색 마스크, 헤드 랜턴, 장전된 가스권총, 권총집이 딸린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경찰은 정씨가 기괴한 복장을 한 것은 평소 좋아하던 영화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중 한명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단순 모방이 아니라 연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계획범죄였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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