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정모(31)씨는 지방에서 홀로 상경, 비정규직을 전전한 '사회적 외톨이'였다. "세상이 나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특히 끔찍한 범죄가 벌어진 '강남의 고시원'은 번화가 한복판에 숨은 외톨이들의 은신처라는 점에서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정씨는 2002년 상경한 뒤 뚜렷한 직업 없이 식당 배달, 주차요원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정씨 주변인들은 "하는 일마다 진득하게 붙어있지 못하고 자주 옮겨 다녔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직업이 없다 보니 이런저런 경제적 압박에 시달렸던 것으로 조사됐다. 예비군훈련 불참으로 벌금 150만원이 밀렸고, 휴대전화요금과 지난달 고시원 월세 17만원도 내지 못했다.
경찰도 정씨가 이 같은 '생활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밝혀, 경제적 궁핍에 따른 좌절과 사회적 불만이 응어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정씨는 범행도구를 2004~2005년 동대문 등에서 구입한 것으로 조사돼 오랫동안 범행을 준비해왔을 가능성이 크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번화가인 강남 지역 고시원에서 5년 동안 기거했다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더 심했을 테고, 이런 불만이 사회에 대한 복수 형태로 폭발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씨 주변 사람들은 정씨가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종달새'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전했다. "상대가 받아주면 한 두시간씩 끝도 없이 주절댔다"는 것이다. 정씨가 말 붙이기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정상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한 주민은 "4차원적인 공상과학 얘기를 자주했고, 식탁의 물병과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며 "사건 전날에도 '이번 주 로또 1등 당첨번호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둥 혼자 횡설수설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또 탈모가 심해 평소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녔고, 여자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로 볼 때 외모 콤플렉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중학생 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자주 두통을 호소했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지는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도 특별한 정신 병력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는 "자기조절 능력이 취약한 상태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이 망상 형태로 왜곡되는, 전형적인 악순환에 빠져든 것 같다"며 "사회적 연대의 끈이나 가정의 사랑 등을 통해 해소될 수도 있었겠지만, 정씨는 이런 것과 모두 떨어진 사회적 이방인이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 '조승희 사건'과 닮은꼴
20일 강남 논현동 고시원에서 벌어진 방화ㆍ살인 난동극은 지난해 4월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뒤흔든 재미동포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살인 사건을 닮았다.
우선 조승희가 범행 때 전투복을 갖춰 입었던 것처럼 범인 정씨도 검은색 '킬러'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정씨는 이날 아침 평소에 한번도 입지 않았던 검은색 상ㆍ하의에 검은색 모자을 눌러쓴 모습을 하고 있어 "옷을 왜 저렇게 입었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고 주변인들은 전했다.
정씨는 또 양 발목에 칼집을 두르고 허리에는 가스총을 차 그야말로 컴퓨터게임 속 '전투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정씨는 또 연기로 자욱한 복도에서 범행 대상을 식별하기 위해 고글과 머리에 소형 플래시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범행 수법의 잔혹성도 닮았다. 정씨는 고시원 3층 자신의 방 침대에 불을 지른 뒤 복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에 놀라 뛰쳐나온 피해자 4~5명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고, 이도 모자라 4층으로 올라가 나머지 피해자 5~6명을 찔렀다. 이 역시 교실 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고 한 명씩 처형하듯 권총 방아쇠를 당긴 조승희의 수법과 유사하다.
정씨는 조승희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혀온 '사회적 외톨이'였다."너희가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는 불만을 터뜨린 조승희처럼 정씨도 "사회가 나를 무시한다"며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송용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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