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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박물관 기증 '55년간의 일기' 쓴 박래욱씨, 생애사 담은 '기억, 기록, 인생이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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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박물관 기증 '55년간의 일기' 쓴 박래욱씨, 생애사 담은 '기억, 기록, 인생이야기' 출간

입력
2008.10.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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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통해서 나를 수련을 시켰어. 일기는 바르게 쓰니까 도둑질을 했다므는 일기에 쓰겄냐 그 말이여. 나 개인으로 말하면 일기는 나다, 그러고 싶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일기야, 그러고 싶어."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인 일기. 그러나 그 일기가 50년이 넘도록 쌓이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 서울 자양동에서 감초당한약방을 운영하는 박래욱(70)씨는 10세 때인 1948년 일기를 쓰기 시작해 지금껏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전쟁 와중에 일기 내용이 혹시나 문제될까 염려한 어머니가 태워버리는 바람에 초창기 일기는 소실됐지만, 타고 남은 종이를 통해 1950년부터의 일기는 복원할 수 있었다.

박씨는 그렇게 1950년부터 2005년까지 55년간 써온 일기 98권을 2년 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2만쪽 1,000만자에 이르는 그의 일기는 한국기네스북에 '최장 기록 일기'로 등재되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박씨의 일기와 그의 구술을 토대로 한 생애사 조사보고서인 <기억, 기록, 인생 이야기> 를 발간했다. 조사와 집필을 담당한 최명림 학예연구사는 "개인의 기억과 구술에만 의존한 기존 생애사와 달리 기억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일기라는 구체적인 기록을 함께 다룸으로써 생애사 조사에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박씨는 책 발간에 대해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일기를 쓴 것 뿐인데…"라며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고 눈물로 한 자 한 자 계속 써온 것이 이렇게 빛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열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께서 '남아 10세면 인생의 흔적을 남겨라. 그리고 우물을 파려면 한 우물을 파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두 세기에 걸쳐 반 세기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박씨의 일기는 한 개인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일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인민군에게 차례로 학살당하고 12세에 고아가 된 그는 힘겹게 기계공고를 졸업한 뒤 농사꾼, 제사(製絲)공장 기사, 화장품 외판원을 거쳐 무허가로 한약을 팔다 정식 한약사가 되기에 이른다.

결혼해 1남 2녀의 자녀를 둔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우여곡절의 인생 사이로 전쟁을 비롯해 부정선거, 새마을운동, 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시대상이 함께 흐른다.

"1950년 8월 31일. 혼자 집을 보고 있는데 큰아버지께서 작대기에 의지하여 오셔서 따라오라고 하셨다. 뒷산 학정봉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 공중에 까마귀가 빙빙 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손이 뒤로 묶인 채 엎드려 죽어 있었다. 너무 무서워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1971년 8월 17일. 34살 내 생일이다. 감초당 한약방 개업하여 17일째이다. 매월 2만원 월급쟁이면 만족으로 알고 그런 정도 수입을 원한 나였다. 내 생일이라고 시장 보아 찬거리 음식상도 먹음직스러웠고 내 새끼들도 잔칫집 우리집 음식 먹으니까 좋은가보다."

박씨는 요즘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한약방으로 향한다. 그곳 책상에서 일기를 쓰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예전에는 가루물감을 물에 타 만든 잉크를 펜촉에 묻혀가며 일기를 썼지만, 요즘은 매끈한 A4 용지에 플러스펜으로 쓰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는 "노인네의 일상이라 별 것은 없지만 60년 가까이 일기를 쓰다 보니 물이 위에서 아래로 졸졸 흐르듯 펜이 잘 나간다"면서 "기왕 내 일기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게 됐으니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넓은 내용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박씨의 생애사 조사보고서 발간과 더불어 '내 삶의 감초, 55년간의 일기' 특별전도 열고 있다. 일기장을 비롯해 금전출납부, 한약처방전 등 박씨가 평생 모으고 기록해온 자료 250점이 11월 3일까지 전시된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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