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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의거 99주년 국제학술대회서 재조명/ "안중근, 동양의 평화 위해 이토 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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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의거 99주년 국제학술대회서 재조명/ "안중근, 동양의 평화 위해 이토 저격"

입력
2008.10.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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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이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지 99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에 '의거'로 또렷이 기록됐지만, 일찍이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안중근의 사상은 세월 속에 희미해졌다.

안중근ㆍ하얼빈학회(공동회장 이태진, 조동성 서울대 교수)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은 사상사의 지평에서 안중근을 바라보는 국제학술회의 '동북아 평화와 안중근 의거 재조명'을 17, 18일 열었다. 안중근 사상이 현재의 동북아 정세에 던지는 함의 등이 다양한 각도로 조명됐다.

■ 이토 저격과 보수적 평화주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이토 저격과 안중근의 평화사상 사이의 연결 고리를 탐색한다. 일견 모순되는 둘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이 교수는 안중근이 옥중에서 탈고한 '동양평화론'을 파고든다. 이 저술은 안중근이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판하면서, 뜻밖에도 그 변화 가능성을 천황제에서 찾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러일전쟁 개전 시 천황이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보장한다'고 천명한 것에 긍정적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등 일본 수뇌부가 천황을 속이고 천황의 뜻을 왜곡, 침략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또다른 옥중 서술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 가운데 첫째가 1867년 이토가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를 시살한 것이라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침략정책을 기획ㆍ수행한 이토를 제거하는 것은 일본이 국제 정의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시발점이며, 진정한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1차 행동이었다고 이 교수는 분석한다.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이 천주교의 평화주의와 어울려 안중근 사상의 기저를 이뤘다"는 것이다.

■ 낭만적 레지스탕스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중근이 연해주 일대에서 지도한 의병운동의 궤적을 통해 그의 사상을 역추적한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계몽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서북 지역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안중근은 만주로 망명, 그곳에서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도 여타 의병세력과 화합하지 못했다. 그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지 않는다"는 '만국공법'의 정신에 따라 풀어주곤 했는데, 그것은 다른 의병 세력이 안중근을 멀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안중근은 독립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의병들의 일반적 분위기와 달리, 투쟁이 단기간에 성공을 거둘 수 없으며 계몽운동이 포함된 대일항전을 장기간 지속해야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병 연설에서도 침략의 최종 책임자인 천황을 규탄하지 않고 이토의 침략정책만을 비판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오 교수는 "생사가 달린 전투 중에도 다소 낭만적인 성향을 드러냈으며, 작전이나 포로 대우에서 종교적이며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 동북아 평화체제의 실천방략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한 세기가 지난 현재의 동북아 질서에도 강한 시사점을 던지는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에 주목한다. 비록 뒷날 후회하고 있지만, 안중근은 러일정쟁을 서양 열강과 동양의 대결이라는 '황백대결'로 보았다.

천주교 신자이던 안중근마저 기독교 열강에 반감을 품을 정도로 당시 계몽주의 계열 지식인들의 반 서방주의는 극심했다. 서 교수는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은 동양주의, 인종주의에 입각해 있었고 서양 열강에 대한 반감은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상쇄할 만큼 확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이런 동양중심주의는 현재의 관점에서 놀랍도록 혁신적인 평화체제 구상으로 이어진다. 안중근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준 뒤, 일본 중국 한국 3국이 공동 관리하는 평화체제를 제안한다. 이곳에서는 3국 공용 화폐를 쓰고 2개국 이상의 언어를 구상하는 청년들로 연합 군대를 편성하자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구상을 했던 안중근은, 그러나 1907년 이후 정세 판단을 달리해 무장 투쟁에 나선다. 서 교수는 이것 또한 "국제여론의 반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토 암살을 채택한 탁월한 전략가적 면모"라고 논문을 맺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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