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0> 한국 가요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0> 한국 가요제

입력
2008.10.21 00:12
0 0

무슨 무슨 축제를 연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대고, 웃고 떠들고 하루를 보내면 스트레스는 날라 간다. 축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신나는 일이지, 슬픈 일로 축제를 여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걸 요즘은 뉘앙스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이벤트라는 말로도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축제를 열고자 하면 우선 돈이 필요하다. 1970년대 초반에는"축제를 주최하려고 하는데 스폰서 좀 서 주시고, 경비 좀 대 주슈."라고 하면 "그거 좋죠."하고 선뜻 돈 줄 사람은 없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을 얻어 물건을 하나라도 더 외국에 팔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중동으로부터 건설 수주라도 더 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서 열리는 야마하 국제 가요제를 참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속이 상해서 혼났다."왜 우리는 저런 가요제를 개최 못하는가?"노래라면 일본 사람들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훨씬 잘 부르고 좋은 곡도 많이 만드는데 말이다. 이건 일본 사람들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돈이 없어서? 그러면 처음부터 국제 가요제를 하지 말고, 국내 가요제라도 몇 번 해 보다가 경험을 쌓아서 국제 규모로 가면 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친김에 국제 영화제도 해보자 는 것이 나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 날부터 나는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 저지르는 데 2등이라면 기분 나빠하는 것이 내 성미인지라, 일단 사건을 터트려 보기로 했다. 돈 문제? 기본적인 시드 머니는 신문사에서 대줄 것이고, 만일 조금 부족하면 스폰서를 구해 보기로 했다.

계획서를 들고 우선 한국일보 장강재 사장을 찾아 갔다. 구두로는 이미 보고를 했기 때문에 장 사장은 쾌히 승낙을 했다. 다음에는 장기영 회장의 결재를 받는 일이 남았다. 장기영 회장이나 장강재 사장의 결재 방식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서류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며 씨익 웃으면 그 사업은 잘 안 된다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서류 놓고 나가 있게"라는 반응이 나오면 그것은 'No'라는 뜻이다. 될 것은 그 자리에서 "오케이"였는데 이날도 Okay였다. 그러면서"이왕 할거라면 쩨쩨하게 하지 말고 멋 드러지게 하라"는 지시도 덧붙였다.

장 사장은 나한테 진행상황을 일일이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준비위원을 구성하느라고 분주하게 다녔다. 또한 언제, 어디서 가요제를 열 것인가, 상금은 얼마로 할 것인가, 심사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 등등 준비할 것이 태산이었다. 정말로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가요제는 1974년 9월 13일부터 3일간에 걸쳐서 열고 장소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좌석 수가 많은 대한극장으로 정했다. 다행히 대한극장에서 대관을 해 주는 바람에 일이 쉽게 풀렸다. 심사위원은 황문평, 이봉조, 길옥윤 등 작곡가와 이백천 등 경음악평론가(가요평론가)와 같은 전문가들, 그리고 신문사 연예 기자들, 방송국의 음악담당 PD들이 초대되었고 자칫하면 생길 수도 있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일반 독자들로부터도 심사위원하고 싶은 사람을 공개 모집했다. 처음엔 심사위원을 100명으로 하려다가 너무 많으면 또 다른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해서 60명으로 정했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Korea Times)의 현재 사장으로 있는 박무종씨도 심사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기성 작곡가이든 신인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나 신곡을 가지고 참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적중했다. 국내에서 응모한 곡이 무려 300여곡이나 되었다. 이 노래들을 전부 부른다면 한 달이 걸릴 지경이니까 예비 심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본선에 올라온 노래들만 무대에 서게 했다.

대한극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좌석이 모자라서 입장을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밖에 스피커를 달아 놓았다. 국제 가요제 형식을 그대로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예선과 결선으로 경쟁을 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많다 보니 점수를 채점하느라고 계산원들이 아주 애를 먹었다.

그렇게 해서 영예의 대상은 전우 작사 김기웅 작곡 박경희 노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라는 노래로 돌아갔다. 금상은 송창식이 자작곡한"피리 부는 사나이"가 차지했는데 이 두 노래를 놓고 실은 어느 곡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심사위원들이 아주 많이 고민하기도 했다. 결정은 매우 근소한 차이로 이뤄졌다. 대상을 받은 가수 박경희는 동경 가요제에 참가하는 특전을 거머쥐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작사가 전우와 작곡가 김기웅은 그 당시로는 큰돈인 100만원을 대상 상금으로 받았다. 그러나 전우와 가수 박경희는 지금 유명을 달리했으니 안타깝다.

가요제에는 쌍둥이 자매인 바니걸스도 袖徨臼?입상을 했고, 10살쯤된 어린 정수라가 작곡가 함중아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불러서 인기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예심에서 탈락한 많은 노래들이 그 뒤로 햇빛을 보고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는 뒷소문을 듣고 나는 매우 큰 보람을 느꼈다. 비록 예심에서 탈락했지만, 수준 높은 새 노래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이다. 이점은 가요제에서 얻는 소중한 재산이기도 하다.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 가요제는 이렇게 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뒤 곧바로 내가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든지, 아마도 앞 뒤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매우 아쉽다. 지금이라도 정말 제대로 된 국제 가요제를 한국에서 매년 개최 했으면 좋겠다. 많은 나라에서 가수들이 와서 노래 부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신곡으로 경쟁하는 가요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음반 산업이 위축될 때 가요제는 큰 기폭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