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장만한 국어사전에서 '춤'을 찾아보니 "[가락에 맞추거나 절로 흥겨워서] 팔다리나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여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동작. 무용(舞踊). 댄스(dance)."라 풀이해 놓고 있다.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명사 '춤'이 동사 '추다'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챌 테다. '춤'의 마지막 형태소 '-ㅁ'은 모음이나 일부 'ㄹ' 받침으로 끝나는 용언(동사나 형용사)의 어근에 붙어 그 말을 명사로 전성시키는 접미사다.
그 이외의 받침으로 끝나는 용언 뒤에선 매개모음 '으'가 들어가 '-음'으로 변한다. 슬픔, 기쁨, 웃음, 울음, 삶, 죽음, 젊음, 싸움, 걸음(이 낱말에선 동사어근 '걷'의 ㄷ'이 활음조[滑音調]를 통해 'ㄹ'로 바뀌었다), 설움(여기서도 '섧'의 'ㅂ'이 '우'로 바뀌었다) 같은 명사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똑같은 형태의 '-ㅁ/음'이 명사화 접미사가 아니라 명사형 어미 노릇을 하기도 한다. "삶은 일장춘몽이야" 할 때의 '삶'은 명사다. 그리고 이 말의 마지막 형태소 '-ㅁ'는 명사화 접미사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적으로 삶으로써 '백의(白衣)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에서 '삶'은 동사(의 명사형)다.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 형태소 '-ㅁ'은 (명사형) 어미다. 이렇게 어간에 명사형 어미가 붙어 서술어 노릇을 하게 된 용언은 문어체나 옛 말투의 느낌이 짙다. "함께 춤을 춤은 사교의 첫 걸음이다"라는 문장에서 두 번째 '춤'이 그 예다. 이 '춤'은. 앞의 '춤'이 명사인 것과 달리, 동사(의 명사형)다.
낳은 동사의 목적어 노릇을 하는
한국어에는 똑같은 꼴을 지닌 명사와 동사(의 명사형)가 수두룩하다는 점만 지적하고 이 대목은 넘어가자. 동사나 형용사 같은 용언의 어근에 덧붙어 그 말을 명사로 만드는 접미사가 우리말엔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생산성이 아주 큰 것 하나가 'ㅁ/-음'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명사들 가운데 그것을 낳은 동사의 목적어 노릇을 하는 명사가 있다.
이 글의 주제어인 '춤'이 그 예다. '춤을 추다'에서 보듯 동사 '추다'가, 제가 낳은 명사 '춤'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문에 나타나는 목적어를, 서양말 문법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 동족목적어라고 부른다.
동족목적어가 될 수 있는 명사는 흔치 않다. 얼른 떠오르는 예로 '꿈을 꾸다'의 '꿈', '잠을 자다'의 '잠', '그림을 그리다'의 '그림' 따위가 있다. "그는 외로운 삶을 살다 갔어"나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웃었어", "그들은 힘찬 걸음을 걸었어", "그녀는 서럽기 짝이 없는 울음을 울어댔어", "그는 의로운 죽음을 죽었어" 같은 문장이 한국어 화자에게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면, '삶'이나 '웃음'이나 '걸음'이나 '울음'이나 '죽음'도 동족목적어의 예가 될 것이다.
내 직관으로는, 앞 네 문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반면, 마지막 문장은 조금 어색하다. 그러니까 내게 '삶' '웃음' '걸음' '울음' 따위는 동족목적어가 될 수 있는데 비해, '죽음'은 동족목적어가 될 수 있는지 확연치 않다. 물론 나와 다르게 판단하는 한국어 화자도 있을 것이다.
명사 '춤'을 둘러싼 기초문법을 이렇게 자질구레하게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사랑의 말'로서의 '춤'에 대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은가 보다. 그래도 얘기를 시작해보긴 하자. 춤을 추는 동물들이 있는 걸 보면, 춤을 인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일부 곤충들의 곡선적 움직임을 춤이라 보지 않는다면, 인류는 가장 춤을 즐기는 종(種)이다. 춤은 놀이이면서 예술이다. 아마 가장 오래된 예술일 것이다.
사실, 춤은 내 교양과도, 몸뚱어리와도 친숙하지 않다. 신경정신과 진료실의 카우치에 누워 있는 내게, 의사가 '춤'이라는 말을 건네고 거기서 어떤 말들이 연상되느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덩실덩실, 하느작하느작, 사뿐사뿐, 빙글빙글 같은 의태부사들이 우선 생각날 것 같다. 이 부사들은 대개 몸뚱이의 가볍고 유연함과 관련 있다.
나는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주워들었던 미뉴에트나 왈츠나 폴카 같은 말을 떠올릴 수 있을 테고, 좀 더 자라서 들은 캉캉, 플라멩코, 탱고, 살사, 힙합 같은 말을 떠올릴 게다. 10대 말부터 20대 초까지 내 또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고고와, 거기에 뒤이은 허슬 같은 말을 생각해 낼 게다. '촌스런' 고고장을 대치하던, '세련된' 디스코텍을 떠올릴 것이다.
거기 곧바로 이어서 서양의 무도회를 연상할 것이다. 젊은 시절 본 장 아누이 원작의 연극 <도둑들의 무도회> 가 떠오를 것이고, '볼룸'이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70년대 젊은 문화운동가들의 탈춤을 연상할 것이고, '불림'이라는 이름의 80년대 '운동권' 무용동아리를 생각할 것이다. 도둑들의>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의 혼례비행을 생각할 것隔? 무당의 접신을 떠올릴 것이다.(그리고 '접신'은, 옆길을 내어, '엑스터시'나 '오르가즘'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적지 않은 춤들은 가상의 섹스다.)
헤로데스왕으로 하여금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올려놓게 했다는 살로메의 춤(거짓말도 참!)을 떠올릴 것이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을 마무리하는 모르지아나의 칼춤을 생각할 것이다. 알리바바와>
오쟁이지고도 사뭇 대범하게 행동한 처용의 춤을 생각할 것이고, 안데르센의 잔혹동화 <분홍신> 을 떠올릴 것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디아길레프, 이사도라 덩컨, 발란신, 니진스키, 최승희, 강수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분홍신>
이쯤 나열하고 나면 내가 춤에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라며 기특해 할 독자도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연상한 '단어들' 대부분의 껍데기만 알고 있다. 나는 미뉴에트와 왈츠도 구별할 줄 모르고, 고고와 허슬도 분별할 줄 모른다.
한 달쯤 전, 한국일보 문화부의 박선영 기자가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장을 만나고 쓴 인터뷰기사를 읽었는데, 무용과 관련해 그 기사에서 거론된 고유명사 가운데 들어본 이름이라곤 조지 발란신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발란신에 대해서도 그 이름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몸으로 분출하는 미적 쾌락
춤에 대한 내 무지는 내 몸뚱어리가 율동과 별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학생 시절 영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친구들에게 이끌려 고고장이나 디스코텍을 찾았을 때(그 시절 고고장이나 디스코텍은 흔히 이성을 '헌팅'하는 사냥터였다), 내 몸은 내내 굳어있었다.
서양식으로 얘기하면 나는, 여자는 아니지만, 자발적 '벽의 꽃'(Wallflower)이 되었다. 내 파트너가 되겠다고 나서는 여성도 거의 없었지만, 그런 여성이 있었을 때도 나는 그녀와 마주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내 몸뚱이는 도대체 리듬이라는 걸 몰랐다. 다른 친구들이 춤을 출 때, 나는 나 같은 빙충이 친구와 어울려 술을 마셨다.
나와 춤의 인연을 되짚어 본다. 나는 젊은 시절 무용 담당 기자를 한 달 반 정도 했다. 연극과 음악을 함께 맡는 소위 공연담당 기자였는데, 무용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내 동료기자에게 넘겼다. 그 한 달 반 동안 내가 무용과 관련해 쓴 기사는 무용가 인터뷰 두 건 뿐이었다.
나는 파리의 물랭루주에서 캉캉춤 공연을 본 적이 있고, 그라나다의 한 동굴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아, 가까운 친구 K의 부인이 꽤 알려진 발레리나다. 나는 서울에서 두 차례, 파리에서 한 차례 그녀의 공연을 봤다. K가 그녀의 고운 마음자리 못지않게 몸의 아름다운 율동에 반한 건 분명하다.
그라나다에서 본 플라멩코는 강한 성애의 암시로 차 있었다. 친구 부인의 공연도 얼마쯤은 그랬다. 하긴, 춤이라는 게 신바람을 드러내는 놀이이자, 몸짓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면, 그것이 사랑과, 섹스와 무관할 수는 없겠다. 춤은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다.
그것은 미적 쾌락의 언어이면서 성적 쾌락의 언어이기도 하다. 아니, 미적 쾌락이 성적 쾌락이다. 춤은 사람을 호리고, 사람은 춤에 홀린다. 동서고금의 엔터테이너들(주로 여성이었겠지)은 그래서 춤꾼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걸음걸이는 춤추듯 가볍다.
춤에 대한 내 콤플렉스는 서른 넘어서 없어졌다. 사회에 나와 사귄 친구들 가운데 '춤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레리나의 남편 K의 춤은 내 춤 못지않은 막춤이다. 친구들과 더러 노래방엘 가면, 이젠 거리낌 없이 춤을 춘다.
더 이상 '벽의 꽃' 노릇을 안 하는 것이다. K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내가 어울려 춤추는 꼴을 누군가 본다면 대뜸 '코믹'이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16세기 말 프랑스 앙리3세의 궁정에서 공연된 최초의 발레 표제가 <왕비의 코믹 발레> 였다. 왕비의>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일러스트 신동준기자 djshin@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