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생, 나이 32세. 영화 80편, TV드라마 10편, 연극 5편에 출연. 아시아영화제 주/조연상, 대종상 주연상, 한국일보/조선일보 영화상 주연상... 따지고 보면 국내영화상의 연기상은 나를 빼놓는 해가 없었다.
그런데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불현듯 찾아왔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선배들이 나이가 들며 조연 단역으로 떨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때 떠나야 한다." 나는 보따리 쌀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감독이라는 내 최종 목표지를 향한 장정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나는 물론 형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데 감독 준비를 하려고 보니 앞부터 캄캄해졌다. 우선 생활 문제가 떠올랐다. 수입자체가 다르다. 감독은 수입이 전무 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내와 상의하였다. 그녀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문제였다. 감독과 배우는 전혀 다르다. 감독은 작품, 즉 하나의 우주를 만들고 배우는 그 속에서 인간을 만든다. 그러니 공부 자체가 다르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감독의 꿈을 가졌던 시절 준비하던 것들은 10년간의 배우생활 동안 철저하게 소진되어 한 조각도 남은 것이 없었다. 우선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독서량을 늘리고 사회와 문화예술, 그리고 모든 분야에 눈과 귀를 돌리기 시작했다.
감독수업을 할 영화학교와 유명감독을 찾아 나섰다. 미국의 UCLA영화과와 일본의 대표적 감독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조감독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배우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한국 최고 감독들의 기예를 배워야 했다. 물론 이런 결심은 누구에게도 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그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만 다지고 또 다졌다.
신상옥 감독과의 <13세 소년>, 이두용 감독과의 <최후의 증인> , 유현목 감독과의 <사람의 아들> , 김기영 감독과의 <느미> . 이 정도라면 나의 국내 수업으로서는 최고의 카드였다. 한국영화사, 세계영화사에 남는 대감독들의 현장이었다. 감독준비를 하고 있는 시선에서 본 그들의 세계는 배우로서 본 시선과는 너무도 달랐다. 작품을 만들기 전 준비과정, 현장 그리고 후반 작업 모두가 너무나도 달랐다. 신상옥 감독의 현장 순발력, 이두용 감독의 현장 집중력, 유현목 감독의 치밀한 준비, 김기영 감독의 새로움과 괴팍함. 나는 성격만큼이나 상이한 네 분의 특징을 모두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들의 일치점은 영화미학이었다. 그리고 한시도 빠짐없이 사회와 사람을 관찰하는 예리한 눈이었다. 느미> 사람의> 최후의>
김기영 감독님과는 늘 스케쥴이 어긋나 함께 작업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와의 작업을 성사시켰다. 작품 <느미> . 시나리오를 읽자 바로 그는 작품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며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지 1분도 안 되었는데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시키더니 근처 충무로 '애플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다방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곤 나를 음악실로 끌고 들어가 녹음기를 틀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작품의 구성과 캐릭터, 주제에 대하여 하나씩 짚어갔다. 한 시간 릴 테이프가 금세 다 지나갔다. 새 릴이 걸렸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느미>
그와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이두용 감독과 <최후의 증인> 작업도 진행시켰다. 촬영장 헌팅부터 함께 했다. 나는 준비한 의상을 차 트렁크에 잔뜩 실었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준비하였다. 감독은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한국전란의 흔적을 쫓는 '오병호 형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1만 피트의 필름이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한 영화제작에 필름이 3만 피트가 넘으면 망한다고 하던 시대에 헌팅에서 인서트격인 분량에 3분의 1을 써 버렸으니 제작사와 충무로의 참새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모든 화살이 나에게 날아온 것은 당연했다. 최후의>
유현목 감독과 <사람의 아들> 작업을 위해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주인공 '요셉'에 빠져 들어가기 위해서 였다. 시장 구석구석을 모두 뒤져 요셉 모습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들고 유 감독님을 찾아가 작품에 대한 설계도를 풀어 놓았다. 그런데 5년 전 <불꽃> 작업 시, 나의 의견을 경청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르게 준비한 보따리를 열지도 못 하게 하고 나를 돌려세웠다. 작업 중에도 내 어떠한 제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불꽃> 사람의>
그러던 중 그에게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완벽한 그의 콘티가 꼬여서 풀리지가 않았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그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행동이 필요했다. 나는 유현목 감독 앞에서 대사를 나지막하게 읊으며 동선을 그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계속 연기를 해 보이자 그가 나의 움직임에 시선을 주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보고 있던 그가 문득 펜을 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새 콘티가 그려졌다. 순간에 스태프들 표정이 밝아졌고 촬영이 마쳐졌다. 그날 밤, 제작자가 촬영 전부터 '하명중 마술에 걸리면 큰일나니 조심하라.'고 조언하여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며 유 감독님이 웃으셨다.
마침내 기다리던 김기영 감독님과의 <느미> 현장. 감독님은 시나리오 보다 더 긴 내용의 장면 설명과 대사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대사를 마음 가는대로, 생각 가는대로 구사해 보라고 하셨다. 스태프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대사의 토씨 하나까지 감독 지시대로 연기해야 하는 것이 김기영 감독 스타일이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웃으며 내가 결정하도록 많은 대사를 준비하였다고 하였다. 느미>
작중 주역은 물론 더 나아가 조감독으로서의 역할까지 맡긴 셈이다. 김 감독님은 준비한 콘티가 꼬이면 촬영을 중단하고 나를 불러 콘티를 짜게 하였다. 황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 콘티를 짜 그에게 넘겼다. 그러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촬영분이 남았다. 나는 그에게 이미 영화의 끝 장면을 찍었다며 완성 후 필요하면 다시 촬영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전국의 흥행사와 기자들을 모아 시사회를 개최하였다. 영화 엔딩에 모두들 환호하였다. 그리고 영화는 대박을 터뜨렸다.
어느 날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하 감독님 부탁합니다." 우리집에서 그때까지 하 감독이란 하길종 감독을 뜻했다. 당연히 형의 이사 간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와'하 감독'을 찾았다. 형의 전화번호를 다시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였다."하길종 감독이 아닌 하명중 감독을 찾습니다."내가 놀라서 물었다. "누구세요" 전화 목소리가 웃으며 말했다. "하명중 감독님, 나 김기영 감독입니다. 당신에게 감독 제안을 합니다."
1983년, 나의 감독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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