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소란하다. 정권 교체 이후 정치권과 정부, 현 정권과 코드를 같이 하는 단체ㆍ기구들이 역사 교과서를 손보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추진과정이 거칠고 막무가내로, 법규와 절차도 안중에 없다. 그들 스스로 점령군이라는 의식을 부지불식 간에 갖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과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십 년 못 갈 권력이 백 년 설계가 필요한 교육을 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이 명시돼 있다. 교사는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 받는다. 이 나라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대의가 순리에 맞게 진행될 수 있도록 법규를 만들고 그에 따른 절차를 세워 두고 있다.
교과서 저자와 출판사는 교육과정에 맞추어 교과서를 집필, 제작한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교과용 도서 심의위원을 위촉하고 심의회를 구성한다. 심의회는 기준에 따라 검정 신청 교과서의 합격 여부를 심의한다. 개별 학교 운영위원회는 담당 과목 교사의 검토를 바탕으로 교과서 채택 심의를 하여 결과를 교장에게 통보한다. 교장은 심의결과에 따라 교과서를 채택ㆍ구입한다. 교사와 학생은 그 교과서로 수업을 한다.
교육 당국의 수장이 할 일은 이러한 절차가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외압을 막아주는 것이다. 특정 정파나 이익단체가 내놓은 안을 들고 법규나 절차에도 없는 '교과서 전문가협의회'를 만들어 검정 교과서를 고치겠다는 것은 헌법 정신에서 한참 벗어난 행위다. 교육감들이 모여 특정 교과서 채택 운운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권한 남용이다. 교장이 역사 교사를 불러 교과서를 바꾸도록 압박하는 것은 스스로 교원의 전문성ㆍ자주성ㆍ정치적 중립성을 부정하는 자기 배반 행위다.
역사 교육의 정치적 중립,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은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 공동체가 학문ㆍ사상의 자유를 기반으로 숙고와 토론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학문ㆍ사상의 자유, 교원의 자주성, 전문성을 보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교육의 전문가는 역사 교사이다. 역사가들이 토의하게 하고, 역사교육자들이 판단ㆍ선택하게 하는 게 순리다.
역사에는 상이한 해석과 다양한 관점이 공존한다. 학생들은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는 데 필요한 지적인 훈련 과정이다. 검정제는 그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절차와 순리를 무시하고 특정 정치 이념을 획일적으로 관철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고 반교육적이다. 특정 정파나 이익집단이 역사 교과서의 우편향ㆍ좌편향 여부에 대해 심판할 자격은 없다. 의견을 낼 수 있지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역사 교과서 개정 시도의 치명적 결함은 교사와 학생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교과서 내용이 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그대로 침투되는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은 교과서의 기능과 학생들의 속내에 무지한 소치다. 역사 교과서는 특정 이념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교과서는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를 촉발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획일적인 역사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 교사들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부정ㆍ훼손하는 것이며, 이는 교사를 순종과 무기력으로 이끌 것이다. 무기력한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겉돌게 할 것이다. 이는 공교육의 위축ㆍ부실을 의미한다. 설마 교육 당국의 수장이나 교육감이 교사의 무기력이나 학생의 단세포적 사고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양정현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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