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주의 폭력 곱씹는 일본식 부조리극
연극 '죠반니'는 한 사내의 23년 만의 귀향길을 부조리극 형식으로 다룬다. 부조리 감각에도 동서양의 차이가 있을까? 서양연극에서 부조리는 1,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싹텄다. 대량 살육과 원자폭탄의 사용 이래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세계,
피조물이라는 공통점 아래 신이 보증해주던 타인이라는 존재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괴물이 돼버렸다. 이 역사적 상흔과 불모의 땅 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시 어린아이처럼 놀이하면서 견디고, 소통을 새로이 모색하며 의존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부랑자처럼.
바로 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대표적 레퍼토리로 갖고 있는 신촌의 산울림 극장에서 부조리함을 가장 일본인다운 의식으로 소화한 작가 베쓰야쿠 미노루의 '죠반니'가 공연되고 있다.
이미 '성냥팔이 소녀'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는 작가 특유의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라든가, 집단의 죄의식을 미약한 개인이 짐 지고 대속하게 한다는 부조리한 세계의 윤리적 요구를 담고 있다.
미야자와 켄지의 저 유명한 동화 '은하철도의 밤'에서 등장인물과 모티프를 빌려와 어두운 상상력을 풀어놓는다. 2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남자는 집단이 호명하는 대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조립해간다.
어린 시절 친구를 밀어 물에 빠트려 죽인 사건은 정말 실제 존재했던 사건인지, 남자가 꾸는 악몽을 우리가 보는 것인지 모든 것이 모호하다. 대사는 넌센스에 차있고 논리적 요소는 해체돼 있다. 시간의 흐름과 인과관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극의 진행을 공전시킨다.
공연은 최근 연출가 김광보가 추구하는 양식적 특질을 충실히 보여준다. 최소주의 무대장치 속에서 공간의 다양한 변용을 끌어내고, 인물들이 입은 잿빛 의상은 그들의 존재감에서 사실감을 효과적으로 탈색한다.
리얼한 감각보다는 알레고리와 상징 쪽으로 이야기를 들어올린다. 극단 청우 소속의 신예 그룹 배우들과 이상직 이창직 등 외부에서 참여한 중견 배우들의 안정된 존재감이 조화를 이룬다.
한 남자의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요약될 '죠반니'는 탈역사주의와 몰역사성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일본인의 역사의식에 성찰을 요구하는 것만 같다.
집단주의의 폭력 아래 자행되거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해진 부조리한 죄에 대한 씻김으로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어쨌든 이 위험한 귀향을 지켜보는 일은 내내 긴장되고, 베케트에서 아다모프까지 부조리극의 다양한 영향과 인용을 찾아보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기무라 노리꼬, 성기웅 번역. 11월 2일까지 소극장 산울림.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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