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불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104마을'.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다. 현재는 중계본동 30-3번지이지만, 1960년대 청계천 용산 등 도심 개발로 집 잃은 철거민들이 옮겨올 당시 번지수를 따 요즘도 '104마을'로 불린다.
일요일인 12일 낮, 청년도 얼마 못 올라 숨이 턱에 차는 가파른 비탈길을 한 노인이 폐품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며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겨울 날 준비는 하셨느냐"고 말을 건네자, 김모(78)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6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10만원짜리 사글세 단칸방에서 혼자 사는 김씨의 월 수입은 폐품 팔아 버는 20만원과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 30만원이 전부다. "찬바람 불면 폐품팔이도 못해요. 연탄값도 너무 올라서 올 겨울엔 전기장판 하나로 버틸까 합니다." 그는 깊은 한숨만 자꾸 내쉬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나…"
'104마을'은 8월 주택재개발 도시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달동네가 사라진 자리에 2012년까지 2,700여 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정비구역 지정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린 마을 입구에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속속 문을 열고, 불암산을 끼고 앉아 환경도 쾌적한 이 지역의 투자가치를 알리는 기사들이 연일 신문에 오른다. 하지만, 대다수 마을 주민들에게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고단한 삶 속에서 지친 몸을 누일 마지막 보금자리를 또다시 빼앗겨야 한다는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104마을' 주민은 출처 : 중계 본동 산104번지 달동네 '연탄길' - 오마이뉴스
출처 : 겨울에만 '잠깐' 관심받는 산동네 - 오마이뉴스
무허가 주택 525가구를 비롯해 1,194가구 3,546명으로, 60%가 월 10만~20만원의 사글세 세입자들이다. 임대주택을 늘려 주민 재정착률을 80%까지 높이겠다는 구청측 구상에도 무허가 주택 주민이나 세입자들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오랜 불황에 재개발 불안까지 겹치며 마을 안 상권은 완전히 죽었다. 13년째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모(52)씨는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장사가 너무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곽모(66ㆍ여)씨가 운영하는 정육점은 아예 개점휴업 상태다. 진열대의 붉은 형광등은 불이 꺼진 지 오래이고, 고기를 걸어놓아야 할 쇠고리에는 빨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곽씨는 "달동네에 언제 호황이 있었겠냐만 지난달엔 가게에서 단돈 십 원 한 장 벌지 못했다"고 했다.
곽씨가 틈틈이 동사무소 식당 일을 해 버는 25만원과 저소득층 지원금 20만원에서 가겟세, 집세로 30만원을 주고 나면 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그는 "정신장애인인 딸까지 챙겨야 해 하루하루가 고달프다"며 "재개발이 된다는데 우리같이 집도 없는 달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다"고 울먹였다.
'달동네 속 달동네' 祖孫 가정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들이 어린 손주들을 거둬야 하는 '조손(祖孫) 가정'에는 달동네 안에서도 가장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슈퍼 앞 평상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도토리를 까고 있던 이모(71) 할머니. 할머니는 고3 손자를 위한 밥상에 인근 밭에서 따온 야채 반찬만 올리는 것이 미안해 도토리묵 별식이라도 만들어주려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왔다고 했다. "아들 며느리가 12년 전 집을 나가 손자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키웠지. 경비일 하던 영감마저 작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만 해."
시집 간 딸이 보태주는 10만원과 공원에서 쓰레기 주워 받는 20만원이 월 수입의 전부다. 그나마도 겨울에는 공원 일자리마저 끊긴다. 벌써 두 해째 겨울에도 기름보일러를 때지 못했다. 하나는 연탄보일러로 바꿨지만, 치솟는 연탄값 대기도 버겁다. "10년 전 교통사고로 목과 오른쪽 다리에 철심을 박았는데 날 추워지면 안 아픈 곳이 없어. 올 겨울은 또 어떻게 나야 하나…."
어느 한 사람 기댈 이 없는 독거노인들의 삶에 비하면, 말벗이라도 되어주고 살아야 할 희망을 안겨주는 손주들을 둔 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지난 6월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홍모(81)씨는 노인연금 8만4,000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 전기료, 수도료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연탄이나 쌀은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불황 탓인지 이마저도 뜸하다.
폐품팔이도 건강이 나빠져 손을 놓았다. '104마을'을 담당하는 한 사회복지사는 "작년 겨울에는 연탄도 못 때 차갑게 식은 방에서 혼자 굶어 돌아가신 노인도 있었다"면서 "독거노인이나 조손가ㅐ?돌보다 보면 가슴이 저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겨울이 두려운 틈새 계층
'104마을'에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200여명. 이들과 별반 다름 없는 경제적 빈곤층임에도 이런 저런 제한에 걸려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차상위' 틈새 계층 사람들은 날품팔이 일도 얻기 힘든 겨울이 닥쳐오는 게 두렵기만 하다.
3년 전부터 치매에 걸린 부인을 돌보는 이모(87)씨는 "40년을 '104마을'에서 살았지만 요즘처럼 힘든 때가 없었다"고 한탄했다. 부인을 혼자서 간병하는 게 힘에 부쳐 올해 초 단기노인복지시설에 맡겼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아니다 보니 한 달에 40만원 하는 간병비 마련하기도 벅차다. 그나마 복지시설에서도 12월 초까지만 머물 수 있다고 해 주름만 깊어지고 있다.
10년 전 '104마을'로 왔다는 김모(50)씨는 '요즘 경기가 나쁜데 어떻게 사시느냐'고 묻자 대뜸 화부터 냈다. "환율 오르고 주식이 폭락해 난리라구요? 이곳 사람들은 값 떨어질 주식도 없지요. 여기서 내몰리면 더 이상 갈 데도 없는 사람들인데…."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돌아 내려오는 길.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104마을' 주민들의 한탄이 내내 귓전을 울렸다.
■ "연탄으로 올 겨울 버텨볼려는데…"
15일 '104마을' 꼭대기에 위치한 '윗골'에 연탄 2,000장을 실은 배달차가 도착했다. 불암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어머, 이 사람들 겨울나기 준비하나 봐"라며 신기한 듯 바라봤지만, 겨울을 앞둔 달동네 사람들에게 연탄 확보는 생존이 걸린 일이다.
배달차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주민 4,5명이 서로 자기 집에 먼저 연탄을 들여달라고 야단이다. 주민 김모(44)씨는 "달동네에는 배달을 꺼리고 배달료 등 추가비용도 많이 들어 공동으로 구매한다"고 말했다. 연탄배달원 김모(29)씨는 "장당 10원이라도 아끼려고 차에서 연탄을 내려 달라고만 하고 본인들이 직접 들고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귀뜸했다.
무게 3.6㎏, 21개의 구멍에서 4,600㎉의 열량을 뿜어내는 막강 화력의 연탄. 서민들 삶의 동반자였던 연탄 소비가 최근 크게 늘고 있다. 2003년 118만9,000톤이던 연탄 소비량은 2007년 209만1,000톤으로 4년 새 69%나 늘었다. 화훼농가나 연탄갈비집 등 비가정용 소비도 늘었지만, 빈곤층의 증가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가정용 연탄 사용자는 20만명 가량이다.
'104마을' 사람들도 연탄보일러로 교체하거나, 연탄난로로 겨울을 나려는 사람들이 많다. 박모(45)씨는 "이 동네는 지은 지 수십 년 된 건물이 많아 외풍이 심하다"면서 "기름보일러 돌릴 엄두가 안나 대신 연탄난로로 올 겨울을 견뎌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영세 상인들도 다시 연탄을 찾기 시작했다. 경남 마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48)씨는 지난해 한 달에 50만~60만원 하는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난방용 연탄난로를 들였다. 최씨는 "연탄재 처리가 문제지만 값도 싸고 화력도 강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마다 연탄값이 급등, 연탄과의 동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1989년 정부 보조금제도를 시행한 이후 2002년까지 동결됐던 연탄값이 2007년 4월에 20%, 2008년 4월에 30%까지 급등, 3년 새 공장도 가격만 장당 100원이 올랐다. 지난해 20만원을 들여 연탄보일러로 바꿨다는 '104마을' 주민 김모(70)씨는 "우리 같은 달동네에는 장당 480원은 줘야 배달하러 온다"고 푸념했다.
덕분에 오랜 침체기를 겪었던 연탄공장이 활황을 맞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삼천리 E&E 연탄공장은 요즘 하루 19만장 정도 찍어내고 있다. 공장 관계자는 "우리 입장에서야 반길 일이지만 텅 비어가는 서민들 지갑사정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김성환 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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