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함으로써 북핵문제는 신속히 정상 궤도로 복귀하고 있다. 미신고시설을 북한의 동의 하에 검증하기로 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7월 12일 6자회담에서 검증체계는 '6자의 만장일치로 수립'된다고 양해했으므로 미국은 북한이 동의하는 검증체계안을 수용한 셈이다. 이러한 양보에 대해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들과 일본이 강력히 반발하자, 부시 대통령은 완전한 검증체계 수립을 '명단 삭제'의 조건으로 새로 부과하였고, 북한은 '주권 침해'라면서 또 한 번의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테러지원국 삭제로 상황 변화
8월 11일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명단 삭제'가 되었다면 북핵문제가 해결 방향으로 좀더 진전될 수도 있었을 텐데 레임덕이 된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이 두 달의 우여곡절 과정을 연출한 것이다.
이제 북한은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편입되고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상징 제거로 북미관계 정상화로의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내디뎌 매우 고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북한은 엄청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북한이 바라는 국제금융기구 가입이나 그로부터의 차관 도입이 눈 앞에 어른거려 조바심은 더 커질 것이고, 북한 내부 사정의 투명한 공개와 투자여건 조성을 위한 실제적 개혁ㆍ개방 조치를 취할 것인데, 이는 부메랑이 되어 체제와 정권의 기저를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정체와 대미 의존 심화로 수세에 몰린 우리 정부는 좋은 기회를 하나 흘려버린 셈이다. 힐 차관보의 방북 전 미국에 '명단 잠정 삭제'를 권고했더라면 남북관계 정상화와 외교의 자주성을 일거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에 미련을 갖기보다는 남북관계 국면 전환의 호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정부는 대북정책을 북핵 상황과 연계시켜왔는데, 북한이 불능화와 검증체계 수립으로 복귀하였으므로 대북 정책을 적극화할 상당한 명분을 확보하였다.
그간 북한을 엄중하게 대했으므로 대북 정책을 적극화해도 반대하는 국민이 많지 않고, 한미 간 신뢰 증진 덕에 미 행정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경제 상황도 남북관계 정상화와 호혜적 경협 증진을 재촉하고 있다. 대북정책에서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하였으므로 북한도 우리 정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유연한 전략적 사고와 의지만 갖춘다면 대북정책에서의 부진을 일거에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반공주의 대통령으로 평가되던 닉슨 대통령이 현실주의 전략가인 키신저의 조언에 따라 역사적 미ㆍ중 화해를 이루어 국제정치의 지형을 미국에 유리하게 바꾸어 놓았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명실 공히 실용주의로 대북정책 기조를 전환함으로써 북핵문제의 진전 여부나 북한의 급변사태 발생 여부 모두에 대비하는 동시에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는 대북정책의 기준을 북한이 아니라 우리의 국익에 두는 데 있다.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고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안보환경을 개선하고 경제 안정을 보장하며 국가신인도를 높이는 동시에 경제발전을 위해 호혜적 경협을 진흥하고 북한의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하다.
실용적 대북 접근으로 전환을
또한 북한의 버릇을 고치는 데 정력을 쏟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남북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도록 해주고 국군포로와 피랍자들을 모셔오기 위해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원활해지고 경협이 진전되면 북한의 개혁ㆍ개방은 자연히 촉진될 것이고 북한 주민들은 자유와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터득할 것이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과 경협 진전은 북핵문제가 호전되면 평화통일 기반 구축 사업이 될 것이고, 북핵문제가 난관에 빠질 때는 대북 영향력을 발휘하고 위기 상황을 완화하는 데 유용한 기제로 활용될 것이며,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에는 우리 정부가 국제적 대응을 주도하도록 보장해 줄 것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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