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가수들은 행복할까? 무대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남을 즐겁게 해 주는 그들의 뒷모습은 어떨까? 지금은 어떻고, 또 옛날에는 어땠을까? 1965년 9월에 나는 가수들을 비롯한 대중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 현장을 눈으로 확인, 취재하기 위해 '쇼 공연'의 무대 뒤를 무려 일주일 동안 함께 따라 다닌 적이 있다.
"다 아는 얘기를 뭣 때문에 고생하려고 하느냐?"는 동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나는 지방 행을 마다하지 않고 취재를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쳤던 것 같다. 진짜로 그걸 뭣 때문에 따라 다녔는지? 함께 다니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걸 가지고 고생만하고, 쯧쯧. 하지만 그게 아니다. 신문기자는 다 아는 얘기라도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수들이나 연주자(밴드 맨)들, 그리고 코미디안들의 애환은 내가 현장취재를 하지 않아도 대충 아는 일이다. 하지만 그 '대충'이 나는 싫었다. 정확하게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막걸리도 마시고, 어려운 얘기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7일간이나 따라 다녔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느 한 구석에 지독한 면이 있나 보다. 실제로 나는 지독한 성격이 아닌 것이 단점인데 말이다.
2008년 10월 7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큰 행사가 벌어졌다. "가수의 날 기념식 및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장 이ㆍ취임식" 행사 였다. 이 자리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청와대 김덕룡 특보, 국회의 정몽준ㆍ정병국ㆍ박지원ㆍ정두언ㆍ송영길ㆍ나경원 의원등이 참석해 축하를 해 주었고 저작권 업계에서는 음악저작권협회 지명길 회장, 음악실연자연합회 송순기 회장과 유기선 사무총장, 음원제작자협회 이덕요 회장 등이 자리를 빛내 주었다. 나도 초청을 받아 참석을 했다.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자격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연예기자 1호'라는 데 대한 애정에서 초청이 이뤄졌을 것이다.
대한가수협회는 2006년에 재창립해서 가수 '남진'이 초대 회장으로 큰 자리매김을 하며 임기를 마쳤고, 그날은 '송대관'이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음으로부터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수들의 위상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 43년 전, 내가 쇼 흥행단을 동행취재 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물 부족한 고기와 물 만난 고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1965년 9월 12일자 '주간한국(한국일보 자매지)'에 실린 나의 기사 일부를 소개키로 한다. "쇼의 무대는 앞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쇼의 화려함은 표면적인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무대 뒤의 무대를 보이게까지 하며 그것은 또한 호기심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 화려한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무대 뒤의 무대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당시 주간한국 부장이던 김성우 선배의 지시대로 나는 일반 쇼단을 따라다녔다. 신문기자, 더구나 사정을 잘 아는 내가 동행한다고 하니까 쇼단 단장은 아주 싫어했다."정 기자가 내용을 너무 잘 알면서 거북하게 뭣 때문에 같이 다니려고 하세요?" 여기서 '거북하게'라는 말은 귀찮게, 또는 성가시게 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나는 남한테 밥이나 술을 얻어먹는 편이 아니니까 걱정 마라, 여관 값도 내건 내가 낸다, 오히려 술도 내가 사 준다"고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단장을 꼬드겨서 따라 나섰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를 다녔는데, 나는 그때 동행취재 했던 기억이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큰 추억으로 남는다. 거북하다고 말했던 단장도 이튿날부터는 금새 허물없이 없어졌고 단원들하고도 친해졌다. 하긴, 단원이라고 해봐야 '햐꾸메, 찐삐라' 가수 두세명하고 밴드 멤버 서너명이 전부였다. 좀 잘 팔린다는 '대가리' 가수들은 그때 그때 서울에서 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어 설명이 필요하다. '햐꾸메, 찐삐라'는 일본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신인 또는 인기 없는 가수라는 말이며,'대가리'는 최고 인기 또는 톱 가수라는 속어이다. 연예계는 지금도 속어들을 많이 쓰는 편이다.
어디 연예계뿐이겠는가? 정치계도 그렇고, 경제계는 더욱 그렇고, 잘 나가는 사람과 뒤쳐지는 사람의 차이는 포털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의 차이라고나 할까? 우선 노래 부르는 순서부터 다르다. 블로그가 먼저 노래를 해야 한다. 그래서 객석의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어 놓게 되면 포털들은 서서히 맨 나중에 나와서 '열라' 박수를 받게 된다.
'캐라'는 얼마나 받을까? 개런티, 즉, 출연료를 그들은 '캐라'라고 말한다. 1965년도에는 어림잡아서 일류극장 입장료가 1만원(지금 돈 환산)이고, 삼류는 2,500원에서 3,000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럴 때 '대가리' 가수들은 하루에 60만원에서 80만원 정도 받았고, 이Ⅹ?'햐꾸메'들은 6,7만원을 받았다. 이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 가요계의 현실이었다. 돈은 그렇다 치고 극장에서 옷(무대의상)을 갈아입을 곳이 없어 조그마한 분장실 안에서 동료들이 치마나 보자기로 앞을 가리고 서 있어야 했다. 물론 남녀가 따로 쓰는 분장실이 없고 혼용이기 때문에 그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TV가 변변치 못하던 시절 쇼 극장 무대는 가수들에게 생명줄 이었다. 한번 실수하면 끝장일 수밖에 없다. 서울 용산에 살고 있었고, 착하고 의리 있는 가수 박모양은 영등포에 있는 모 극장 무대에 섰다가 관객들 서너 명이 "시시하다. 집어치워라"고 야유를 하자 울면서 뛰어 내려와서 그 길로 가수를 그만 두었다. 오늘날의 인터넷 악플과 비교 할만하지 않을까?
60년대 시장도 좁고, 경제성장이 보잘 것 없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가수들은 국민들의 큰 위안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수들의 사회적 위상은 매우 높아져 있다. 출연료와 전반적 수입도 지난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 차이가 난다. 그러나 불우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현실이다. 성대하게 진행되는 가수협회 회장 이ㆍ취임식장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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