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분쟁 지역엔 그가 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동 등 분쟁 지역을 누비며 종족 분쟁과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왔다.
러시아 비보르크에서 태어난 아티사리는 "2차 대전 때 소련에 의해 강제이주 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평화 증진과 인도적 지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28세 때부터 외교관의 길을 걸으며 분쟁 조정 해결사로 나선 그는 나미비아에서 처음 중재력을 발휘했다. 유엔 사무총장 대리로 있던 1990년 나미비아가 남아공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데 숨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94년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핀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대통령 임기 6년 동안 핀란드를 유럽연합(EU)에 가입시켰고 국제 분쟁을 중재하는 위기관리이니셔티브(CMI)를 창립했다. 99년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당시 러시아 총리, 스트로브 탈봇 당시 미국 국무차관과 함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유고 대통령을 설득, 코소보 사태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 2000년에는 아일랜드공화군(IRA)의 무장해제 과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뒤로는 인도네시아 아체 분쟁, 코소보 독립, 이라크 평화 정착에 주력했다. 특히 2005년 쓰나미로 아체 지역 주민 13만명이 희생된 후 인도네시아로 달려가 인도네시아 정부와 반정부 단체 자유아체운동의 협상을 중재하기도 했다. 결국 그 해 8월 아체의 독립 포기와 아체 지역의 완전한 자치 및 중앙정치 참여 등을 골자로 하는 평화안에 양측이 서명하면서 아티사리는 30년에 걸친 유혈 분쟁을 종식시켰다.
그 해 11월에는 유엔 코소보 특사로 임명돼 코소보를 세르비아에 포함시킬지 또는 독립시킬지 여부를 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2007년 유엔, 미국, 러시아가 코소보 협상을 이끌면서 코소보 문제에서 손을 뗀 뒤에는 이라크 문제에 몰두했다. 그 결과 이라크 수니파와 시아파의 중재를 주도할 수 있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AP통신 등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1989, 1990년 당시 나미비아 독립을 이끈 것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은 뒤 "이번 수상으로 평화중재를 위한 성금 모금이 더 용이해질 수 있어 기쁘다"고 밝혔다.
최지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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