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이미 정글이다. 약육강식의 독한 생존법칙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입 바른 말로 중화돼 도시인들의 피와 뼈를 점거했다. 다들 이곳은 '동물의 왕국'이라며 혀를 차고 고개를 꺾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대가 이미 야생의 날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직도 초원과 사막을 그리워한다. 떠날 수 있다면 그곳은 이 저열한 '동물의 왕국'과 다를 거라고 저마다 황톳빛 꿈을 꾼다.
그 꿈의 해방구일까. 이 지루한 정글 도시에 정글룩(Jungle Look)으로 무장한 여인들이 나타났다. 표범, 얼룩말, 호랑이 무늬로 몸을 감싼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무미건조한 도시의 가을을 화려하게 변주하고 있다.
섹시하면서도 도회적인 애니멀 프린트의 정글룩. 명품 패션부터 저가 브랜드까지 앞 다퉈 선보이고 있는, 올 가을ㆍ겨울 멋쟁이 여성들의 핵심 아이템이다.
■ 애니멀 프린트, 얌전한 아가씨도 가뿐히
그동안 '호피 패션'은 평범한 여성들에겐 금기의 영역이었다. 복부인의 상징이거나,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전유물이거나, 패셔니스타 외에는 범접할 수 없는 부담스런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야생성이 패션계의 메가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올 가을 호피 프린트는 드레스, 코트, 블라우스를 넘어 뱅글, 조끼, 부츠, 구두에까지 스며들었다.
섹시하고 관능적인 여성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인 만큼 그동안은 여성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원피스, 타이트한 블라우스, 속옷 등에 많이 사용됐지만, 올 시즌엔 과감한 애니멀 프린트를 부담스러워 하는 여성들을 위해 품목과 색상이 다양해졌다.
호피 무늬뿐 아니라 얼룩말 무늬, 표범 무늬 등 다채로운 동물 패턴이 로베르토 카발리, 장 폴 고티에, 돌체 앤 가바나 등 메이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고 있다.
'헌팅 시크'를 테마로 애니멀 프린트를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는 랄프 로렌. 마치 프린트로 찍어낸 듯 정교하게 표면을 깎아내 좀더 절제되고 럭셔리하게 풀어낸 게 특징이다.
랄프 로렌의 박석민 홍보과장은 "전체를 호피로 두르는 대신 호피에 블랙 톤의 다른 의류 조직을 함께 써서 톤다운 하면 섹시한 이미지 대신 좀더 가볍고 세련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며 "평범하고 얌전한 사람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게끔 우아하고 클래식한 이미지로 변형했다"고 설명했다.
직장 여성들을 위한 클래식한 호피 아이템도 눈에 많이 띈다. 칼라 부분만 고급스러운 레오퍼드 프린트의 실크 스카프로 장식한 타이트한 재킷은 디테일이 절제돼 단정한 느낌을 주고, 얼룩말 무늬가 들어간 블라우스는 차분하면서도 도회적인 인상을 풍긴다.
캐주얼 브랜드 탑걸의 김혜원 홍보팀장은 "블라우스나 셔츠 등 상의를 애니멀 프린트로 선택했을 때는 프린트에 들어간 컬러들 중 동일 컬러로 하의를 매치하면 키가 커 보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컬러의 조합으로 너무 정신 없어 보이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 그래도 부담스럽다면 소품으로 활용을
섹시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정글룩의 다양한 변주에도 불구, 여전히 애니멀 프린트가 부담스럽다면 스카프나 가방 같은 소품으로 포인트만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스카프는 캐주얼이나 정장 스타일 모두에 두루 잘 어울리며 연출법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장점.
발랄한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호피 무늬 특유의 골드 컬러 대신 분홍이나 보라색 등으로 변형된 것을 선택하면 된다. 간편한 티셔츠와 스키니진, 부츠를 매치한 다음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면 캐주얼하면서도 에스닉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애니멀 프린트 구두와 벨트 등도 올 겨울 패션의 화려한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송치 재질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호피 롱 부츠는 건조한 겨울 다리를 화사하게 장식해줄 뿐 아니라, 심플한 디자인으로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까지 낸다. 올 블랙 의상에 포인트를 주는 호피 시계는 시크한 포인트로, 호피 무늬 레깅스는 복고 룩의 포인트로 한몫 한다.
■ 대담한 호피 코트 한 벌이면 '간지' 끝
애니멀 프린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면 과감히 도전해 볼 만한 아이템이 바로 호피 코트다. 호피 코트는 유행을 타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벌만으로도 전체적인 인상을 스타일리시하게 바꿀 수 있는 효자 아이템.
모피와 믹스된 럭셔리한 디자인부터 가벼운 인조 소재의 저렴한 코트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으므로 체형과 스타일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특히 무릎까지 떨어지는 심플한 디자인의 호피 코트나 호피 트렌치 코트는 흰 블라우스, 검정 스커트와 코디하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단, 코트가 포인트인 만큼 다른 액세서리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
애니멀 프린트가 들어간 트렌치 코트나 코트, 재킷 등 아우터는 자칫하면 컬러와 프린트가 화려한 만큼 뚱뚱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가벼?소재를 선택하지 않으면 정말로 '동물'처럼 보일 수도. 때문에 겉옷 속에는 블랙이나 네이비 등 어두운 단색 옷을 입어 주는 게 현명하다.
더 섹시한 면을 어필하고 싶다면 가죽 소재로 된 제품을 활용하는 게 좋은데, 이때 가죽 스커트나 부츠, 장갑 등을 매치하면 세련돼 보인다.
호피 같은 건 남들 얘기라고 외면해 왔던 얌전한 여성들이여. 올 가을과 겨울엔 억눌린 자기 검열의 시선을 벗어 던지고, 야생의 사막을 가르는 한 마리 짐승처럼, 색다른 변신의 기쁨을 누려보는 게 어떨까. 도시라는 정글을 탐험하며 자아를 성취하는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낼 수 있을 것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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