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불법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서기석)는 10일 이 전 회장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및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관련 배임 혐의에 대해서는 각각 무죄를, 1,128억원의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일부 유죄를 인정했다.
이학수 전 부회장에게는 다른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씩을, 김인주 전 사장에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각각 사회봉사 320시간을 명령했다.
최광해 부사장에게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40시간이 선고됐고, 현명관 전 비서실장 등 4명은 1심과 같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항소심 판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원심과 달리 삼성SDS BW 저가발행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부분이다. 1심은 1999년 삼성SDS가 적정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BW를 발행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손해액을 50억원 미만으로 산정, 공소시효 7년이 지났다며 ‘면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신주나 잠재 주식 발행에 따른 거래는 회사와 출자자 사이의 자본거래”라며 “전환가격이 적정가보다 낮게 정해져 출자금이 적게 납입됐다 해도 회사에 그 차액 만큼의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자금조달 목적이 아니라 조세를 회피하고 지배권을 이전하기 위해 신주를 저가 발행할 경우, 경영진이 적정가 발행에 상당하는 자금을 회사로 들어가게 할 의무는 없다”며 “주주배정 방식이든, 제3자 배정 방식이든 회사의 손해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저가발행 역시 경영상 판단이며, 기존 주주의 손해는 회사의 손해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재판부는 “경영자에 대한 기존 주주의 손해배상 청구와는 별도로, 업무상 배임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며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허태학ㆍ박노빈 에버랜드 전ㆍ현직 사장이 이미 1,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상반된 판단이다.
당시 재판부는 배임 혐의에 대해 ‘회사 손해설’을 취한 반면, 이번 재판부는 ‘기존 주주 손해설’을 택한 것. 허씨와 박씨는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라 에버랜드 CB 헐값발행 사건의 최종 판단은 결국 대법원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두 재판이 같은 사안에 대해 상반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어느 하나는 뒤집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이 전 회장 사건과 허ㆍ박씨 사건을) 병합 심리하기보다는 동시에 따로 진행하면서 함께 결론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특검법상 상고심은 항소심 선고 후 2개월 내에 선고하도록 돼 있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연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판결은 이 전 회장측 방어논리를 적극 수용해 ‘경영권 편법증여에 면죄부를 줬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할 전망이다. 1심 판결은 그나마 “제3자 배정방식 저가발행의 경우, 기존 주주의 손해는 회사 손해로 포섭될 수 있다”고 봤지만, 2심은 배임 혐의 적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실정법상 무죄를 선고하지만 도덕적으론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만큼 사회지도층으로서 앞으로 국가 발전에 헌신해 달라”고 의례적인 당부를 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 특검 “법원 논리대로면 삼성전자 1원으로도 차지… 상고할 것”
10일 항소심 재판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자 조준웅 특별검사와 관련 사건 고발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조 특검은 "전환사채(CB)나 신주를 저가 발행해 이재용씨와 같은 특정한 제3자에게 혜택을 주고 그 회사의 지배권을 가져가게 하더라도 회사 이사들이 배임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라며 "이런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면 어떤 회사라도 헐값에 CB 등을 발행해 경영권을 타인에게 넘길 수 있고 삼성전자도 단돈 1원으로 차지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법원 판례에도 어긋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이를 다시 전원합의체에서 뒤집어 보라는 셈인데 용기는 대단하지만 너무하다"며 "즉각 상고하겠다"고 말했다.
고발인인 곽노현 방통대(법학) 교수도 "삼성 등 재벌의 지배구조 현실을 전혀 모르는 듯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곽 교수는 "목적과 상관없이 신주를 발행하는 의사 결정은 법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선언한 재판"이라며 "사법부의 마지막 권위조차 냉소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믿고 방향타를 잡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삼성측은 핵심 쟁점이었던 두 가지 배임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선고가 내려지자 고무된 분위기였다. 삼성측 이완수 변호사는 "재판부가 법리해석을 종합적으로 해서 내린 결론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도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재판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거기(법)에 대해서 제가 뭘 압니까"라고 말을 아꼈으나 한 시민이 악수를 청하자 웃는 얼굴로 손을 잡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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