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참말하기/유안진 지음/ 천년의시작 발행ㆍ 138쪽ㆍ7,000원
참말을 하고 싶지만, 거짓말로 그 뜻을 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친한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툰 뒤 던지는 "갈 테면 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같은 말에는 "정말 가버리면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는 속뜻이 담겨 있다.
시인은 참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유안진(67) 시인은 13번째 시집에서 거짓말로 참말하기의 묘미를 보여준다. '거짓말로 참말하기'의 공리성은 이 시집의 표제작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지독한 풍자의 수사다.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孤兒)요/ (한 신문에 실린 이 풍자로 관련자들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보드리야르의 가상현실 이론을 꺼내들지 않더라도, 시인은 참과 거짓이 뒤섞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명이 불가능해진 21세기적 현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꿈도 현실 같고 현실도 꿈 같아서/ 현실은 늘 오늘 여기에 없었다'('초현실이 더욱 현실이다')와 같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해체로 표현되기도 하고, '잠결에 하는 말이 더 진담이고/ 코로 부르는 노래가 더욱 눈물겨운데/ 티눈으로 살펴봐도 넘어지고 거꾸러지는데/ 뜬 눈으로 지켜도 잠도 꿈도 놓치는데/ 비정상이 정상인데, 다수의 횡포야'('지극히 정상적인') 같이 비정상과 정상, 꿈과 현실의 넘나들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같은 이항대립적 세계의 허물어짐은 '나를 열지 않고는 들어갈 수도 없고/ 나를 닫지 않고는 나갈 수도 없는 훗날의 거기를/ 오늘의 여기로 살아야 한다)('훗날이 오늘이다')처럼 시간의 유한성에 포박된 인간존재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사유로 나아가기도 한다.
'… 정월, 플라터너스는 잎새 몇 장을 붙잡고 안 놓는다/ 2월, 응달진 산자락에 잔설(殘雪)이 희끗희끗하다/ 3월, 남녘은 매화꽃이 핀다는데 중부지방 날씨는 진눈깨비 예보이다…)('할 말이 남아있다고')나 '… 시멘트 벽을 치솟은 철근 한 끝에 누런 타월이 그네를 타고 있다/ 간이 사무실에는 뿔테안경 혼자 나무책상 위에 누워 낮잠에 빠졌다'(건망증, 놓아주다') 같은 시들은, 마치 김광규나 김기택의 시처럼 사물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삶의 진실을 각성하는 시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2006년 서울대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시력 43년의 시인은 퇴임 무렵부터 습작시인, 신진시인들과 어울려 매주 '수요반'이라는 시 합평회에 참가해 자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집은 끊임없는 연단을 멈추지 않는 한 시인, 그 시 세계의 참모습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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