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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0> PIFF서 임권택 감독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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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0> PIFF서 임권택 감독 재회

입력
2008.10.1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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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금융대란으로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기 시작한 10월 초, 부산에서는 그 냉기를 녹이려는 듯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행사들이 잇달아 열렸다.

세상을 지탱시켜주는 다른 한 축은 예술적 소비(Expenditure)가 아니겠느냐는 주제의 부산 비엔날레(9.6-11.15), 198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열린 부산 국제관함식(10.5-10.10), 그리고 부산 국제영화제(10.2-10.10)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이 세 행사에 모두 참가했다. 비엔날레는 이두식 화백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국제관함식은 해군자문위원자격으로, 영화제는 한 솥밥 먹는 식구 자격으로.

나는 행사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영화인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그 중에도 임권택 감독님과 보낸 시간은 매우 특별했다. 영화제 개막식장에서 만난 우리는 한 순간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지됐던 그 순간, 우리는 한 세월의 이야기를 전부 나눈 것 같았다.

이윽고 잡은 손은 델 듯이 뜨거웠다. 100도의 화상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우리는 가장 순수할 때 만난 사람들이었어”

문득 감독님이 말했다. 그 소리가 내 귀청을 치는 순간, 나는 뇌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내 몸이 눈처럼 녹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한참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영화 <족보> 때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말없이 나를 꼼꼼히 뜯어보기만 하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뗄 듯하다가 마는 것은 그분 특유의 습관이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참 아름다운 분이구나.” 우리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촬영지 전주에서 감독님과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을 때였다. 조수석에 앉았던 그가 ‘운전 잘 하는 것 같다’고 넌지시 한 마디 던지더니 ‘한번 해 보시겠느냐?’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그대로 달렸다. “어 이게 이런 거구먼.” 그 후 그는 내 운전 제자가 되었다.

촬영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감독님이 핸들을 잡았다. 아마도 촬영보다 운전하는 재미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운전을 가르치며 혼내는 재미가 더 좋았던 것 같으니까. 우리는 고속도로를, 국도를, 시골길을 함께 돌고 돌았다. 커브길마다 나는 ‘브레이크, 악셀!’을 외쳤고 감독님은 그때마다 차를 요동치게 했다. 잘못하면 신나게 야단을 쳤다. 당신은 싫었겠지만 나는 그 때마다 기분이 ‘짱’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고 영화 <족보> 는 그 해 대종상 작품상을, 나에게는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또한 일본 NHK-TV에서 3번씩이나 방영하는 최초의 한국영화가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우리는 <깃발없는 기수> 로 다시 만났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는 스승이 아니었다. 그는 운전면허도 땄고 자동차도 샀다. 조수석에 타보았다.

“선생이 옆에 있으니까 운전이 잘 안 되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보란 듯이 차를 몰았다. 내가 운전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성이 있었다. 내차를 버리고 그의 차를 타고 촬영장을 누볐다. 그의 차 운전은 부드러웠지만 연기지도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또한 욕심이 대단했다.

밤거리, 폭우 속을 달려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강한 빗줄기와 불빛 때문에 카메라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즉각 불호령이 떨어졌다. 라이트 옆에 세운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 그랬다고 설명해도 그는 절대로 속도를 줄이지 말 것을 요구했다. 도리가 없었다. 사고가 날 것이 뻔했지만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빗줄기 사이로 하얀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빛을 향해 달렸다. 그리곤 갑자기 시야가 사라졌다. 라이트와 정면으로 충돌해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을 들어 시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머리와 눈 위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 내렸다. 머리가 터지는 듯하였다. 그대로 바닥에 다시 쓰러졌다.

수술대에 누운 나는 마취를 거부하였다. 그냥 꿰매라고 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술하면 부기와 수술 자국으로 촬영이 중단되게 되어 있었다. 의사는 고통이 심해서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극구 만류했다. 순간 감독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상적인 수술을 받으면 대종상 출품을 목표로 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연속 대종상 트로피를 거머쥐겠다고 다시 뭉친 것이 아닌가.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냥 꿰매세요.” 머리와 눈 위로 30번 이상의 바늘이 빠르게 움직였다.

수술을 끝내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모두 철수하고 아무도 없었다. 감독님의 여관방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 안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들어서는 내 얼굴이 아무 이상이 없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껌벅였다. “자, 보세요. 아무 일 없어요.” 나는 어서 촬영을 계속하자고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스태프들에게 수술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웃고 있는 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무슨 말인가를 입 안에서 우물거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이 뜨거워 오기 시작하였다. 그 해, 1979년 우리는 다시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맞다. 30년 전에 그랬다.

30년 후, 그의 손이 내 손을 다시 잡고 있었다. 우리 손의 열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듯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의 뜨거운 체온과 검은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왜 일까.

우리 한국영화인의 뜨거운 열기가 있기에,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검은 눈동자가 있기에 우리의 영화는 활화산 같이 영원히 타오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부산영화제의 붉은 카펫 위를 행진하는 수많은 스타들을 바라보며 저것이 우리 대한민국이고, 우리의 재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기쁨과 행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피어나는 한국영화 예술혼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천재적 예술혼과 노력으로 변함없이 세계 인류에게 행복과 꿈을 선사하게 해야 한다.

현 한국영화계의 위기를 헤쳐 나갈 길은 우리의 뛰어난 영화인재가 이탈하지 않고 계속 영화에 매진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법뿐이다. 영화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재산이고 인류의 재산이다. 21세기는 4차원 시대이고 사이버 시대이다. 영화는 인류에게 ‘판타지’를 선사하는 꿈의 예술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 영화는 미래를 예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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