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 여기 국밥 한 그릇 주오."
사극을 볼 때마다 내 촉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대사다. 택시도 자가용도 버스도 없는 흙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목로주점의 평상에 주저앉는 남정네들. 붙임성 있는 주모는 반갑게 객을 맞으며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국밥 상을 내온다.
작은 반상에는 국밥, 사발, 술 한 병. '어떤 육수의 국밥인가?' '술은 탁주인가 청주인가?' '저렴한 국밥과 먹는 술이니 탁주가 맞겠군.' '밥은 국물의 몇 분지 일이나 말아다 주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문득, '헉,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평상에 앉아 먹는 국밥과 술 한 잔이 당치도 않았을 것인데' 하며 21세기 아낙으로 태어난 것에 새삼 감사한다.
■ 우리 힘의 원천, 국밥
'밥심'이라는 표현, 참 좋은 말이고 옳은 말이다. 밥을 먹음으로써 생기는 힘이기도 하고, 밥 한 술로 따뜻해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밥을 먹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따져보면 그 가운데 한국인들의 밥공기가 가장 큰 편이다.
지금이야 먹을거리도 다양하고, 영양 정보도 넘치기 때문에 '탄수화물 과다가 좋네, 안 좋네' 하며 밥공기 사이즈가 많이 작아진 편이지만. 불과 이십여년 전만해도 '고봉 밥'이라는 표현이 흔할 만큼 밥공기도 크고, 한 끼에 먹는 밥의 양도 훨씬 많았다.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도 밥을 먹기는 하지만, 그들의 밥공기는 한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을 만큼 가뿐하다. 우리만 밥공기에 밥을 묵직하게 담고, 밥공기 움직이는 일 없이 식사를 한다. 그 밥과 함께 국을 먹는다.
국은 주로 소나 돼지의 뼈를 고아서 만든 육수를 기본으로 한다. 간혹 닭이나 오리 등을 고아서 쓰는 요리도 있지만, 어쨌든 기본은 소 아니면 돼지다. 기름을 착착 걷어가며 오래 우려낸 뼈 국물은 영양 덩어리, 요즘 시각으로는 칼로리 덩어리다. 소와 돼지가 갖고 있던 영양분이 오롯이 우러나온다. 그 국물을 여럿이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점도 플러스다.
푹 고아 만든 국물에 취향 맞는 간을 하고 밥을 말아 먹는다. 뱃속이 뜨끈해지면서 이마에 땀이 송송 오른다. 시름을 잠시 잊고, 깊은 국물 맛에 어느덧 빠져든다. 그렇게 열심히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 소고기 국밥 Vs 돼지 국밥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뽀얗게 우려낸 채로 먹는 돼지국밥을 제일 좋아한다. 흔히 말하는 '다대기(매운 양념)' 등을 풀지 않고 맑은 국물로 먹으려면 깨끗이 손질한 양질의 돼지 뼈, 돼지 머리가 필요하다. 한참을 끓여 낸 국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춰 떠 먹으면 정감있는 맛이 난다. 국물을 뽀얗게 내기 위해 소의 잡뼈를 섞어 우리기도 한다.
기름기가 쪽 빠진 돼지고기는 새우젓에 찍어 먹어야 소화가 쉽다. 새우젓국과 돼지고기가 만나 소화 효소 분비를 활발하게 한다. 돼지국밥하면 부산, 밀양이 다 생각나지만, 장날 구경에 종종걸음 치던 빈속을 달래준 전남 창평 돼지 국밥이 그립다.
'쇠고기국밥은 양념이 강하다.'는 생각을 늘 하던 터였다. 그래서 담백한 맛을 선호하는 나는 늘 소 국밥보다는 돼지 국물이었다. 선입견이 무너진 계기는 바로 경남 함양에서다.
함양의 40년 된 맛집 '대성식당(055-963-2089)'의 쇠고기국밥은 맛이 '예술'이었다. 붉은 빛이 사알짝 돌기는 하지만 양념이 드세지 않고, 코를 찌르는 마늘향도 없고, 고소한 육수의 맛이 깊게 느껴졌다.
국밥은 대표적인 저잣거리 음식이건만, 이 집의 쇠고기국밥은 왕에게 진상하려고 몇 날을 우려 낸 고급 수프 같기도 했다. 겉도는 기름기가 없고, 국물과 함께 익어버린 고기는 야들야들 입에서 녹았다. 밥과 국을 '따로' 주는 스타일로, 국물에 애초부터 밥물이 우러나오지 않아 깔끔한 점도 좋았다.
밥 따로 국 따로 몇 술 먼저 뜨면서 국물 맛을 충분히 음미하다가 결국 남은 밥을 다 말게 되는, 소주 한 잔 건너 뛸 수 없는 조화. 적당히 탄력 있게 지은 밥은 뜨거운 국물에 쉬 풀어지지 않고, 고소한 육수가 밥 알 사이사이 스며들어 입 안에 꽉 들어찬다. 어떤 걱정거리가 있다 한들, 이 순간만큼은 깜빡 잊게 하는 맛이다.
■ 국밥 메들리
가족 모두 애주가인 친정 식구들이 과음한 다음날이면, 엄마는 뚝딱 김치국밥을 끓여 주신다. 지금도 회식 다음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엄마표 국밥' 먹으러 친정에 들른다.
잘 다듬은 멸치로 국물 내고, 배추김치 툭툭 썰어 넣어 흐물거리게 익혀 낸, 아예 밥을 말아서 조금 더 끓이다가 상에 나오는 그 국밥 냄새만 맡아도 몸은 벌써 회복이 된다.
죽이랑 국밥의 중간이랄까, 아무튼 회사 가기 싫다가도 그 국밥 한 그릇 먹고 나면 '그래, 오늘도 힘을 내야지' 하고 마음이 바뀌게 하는 마법이 숨어 있다.
연애 시절부터 데이트 장소로 자주 들락거린 '명동 따로 집 쇠고기국밥'. 소고기 국밥 하나에 모듬전을 시켜 가운데 두고 '우리가 정말 결혼할 수 있을까?'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했던 많은 날들. 국밥 집 문 밖에 눈이라도 내리면, 쇠고기 국물로 뜨뜻해진 손을 맞잡고 명동에서 낙원동으로, 가회동으로 잘도 걸었더랬다.
전주 '왱이집'의 그 유명한 콩나물국밥, 우리 집 근처 나의 아지트 '옛날 순대국', 제주도에서 먹은 고사리 해장국. '국밥' 좋아하는 뚝배기 같은 남자를 만나서 어느새 맛을 들인 나의 '완소' 메뉴들이다. 지칠 때마다 힘과 마음을 되찾아 주는 보약 같은 메뉴들이다.
박재은·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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