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東京)대, 교토(京都)대 같은 옛 제국대학이 수준 높은 것은 다 알지만 나는 작은 지방대학 출신이다. 지방의 작은 대학을 나와도 노벨상을 탈 수 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거의 독학으로 대학 교수가 된 뒤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면서까지 연구에 매진한 시모무라 오사무(下村脩ㆍ80) 미국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9일 선정됐다. 일본 언론들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노벨상 수상으로 영글었다며 그의 연구 인생을 높게 평가했다.
9일 요미우리(讀賣)신문 등에 따르면 시모무라 교수는 어린 시절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 오사카(大阪)를 떠돌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중학생 시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습을 피해 나가사키(長崎)현 이사하야(諫早)시로 소개(疏開)됐으나 전학 첫날 그를 기다린 건 학도 동원이었다.
그날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수공장에서 일만 했다. 열 여섯 살 때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는데 그의 집은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12㎞ 떨어져 직접적인 피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나가사키 시내에서 실려오는 시체를 봐야 했던" 우울한 나날이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전쟁이 끝났어도 그는 고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느라 중학교 졸업장을 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곳 없어 어찌할 줄 모르던 참에 원폭 투하로 캠퍼스가 완전히 파괴된 나가사키 의대 부속 약학전문부(현 나가사키대 약학부)가 집 근처 옛 일본군 병영을 빌려 이전해왔다.
"약학 같은 데는 흥미가 없었다. 비행기나 배를 설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젊은이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의 과학 공부는 나가사키 의대 약학전문부에서 싹이 텄다. "옛 제국대학 출신 중에 대단한 학자가 많지만 나는 달랐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아마추어 연구자에 불과했지만 선입관에 얽매이지 않고 연구할 수 있었다."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나고야(名古屋)대 진학을 선택했고 거기서 히라타 요시마사(平田義正) 교수를 만났다. 히라타 교수는 갑각류 갯반디의 발광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 인연이 노벨상 수상의 밑거름이 됐다. 1960년 풀브라이트 유학생으로 미국 프린스턴대에 유학한 시모무라 교수는 이듬해 워싱턴대 프라이데이 하버 연구소에 있으며 해파리에서 녹색형광단백질을 발견했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한 업적이다.
63년 귀국한 그는 나고야대 조교수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2년 만에 다시 미국 행을 택한다. "연구에 전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연구자금이나 월급을 스스로 조달하는 길을 택했다." 프린스턴대와 우즈홀해양생물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고 2001년 퇴직한 뒤 지금도 집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연구에 쓸 해파리를 잡는데 총동원해도 군소리 없이 따라준 가족도 그를 지탱해준 큰 힘이었다.
"지식의 거의 대부분을 독학으로 얻었다"는 그는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은 곤란에 부딪치면 쉽게 해결되는 방향으로 가버리는데, 흥미 있는 과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헤쳐나가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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