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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28> '美기밀 유출' 로버트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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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28> '美기밀 유출' 로버트 김

입력
2008.10.0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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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내 의회 사무실에 한국의 국회의원이 찾아왔다고 비서가 전했다. 누군지 이름을 물었지만 전혀 생소했다. 그래도 우선 들어오게 해서 만나게 되었다. 명함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고 써 있었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꽤 젊어 보였으나 표정은 무척 심각했다. 앉자마자 나는 뜨거운 커피를 대접했고, 무슨 사정으로 찾아왔는지를 차근차근 물었다. 그의 말이 자기 형님 일 때문에 내게 들렀는데, 형님의 이름은 로버트 김이며 미 해군 비밀서류 유출 혐의로 기소돼 지금 감옥에 있는 형님을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물어보니 오직 미국 연방의원만이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면서 내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로버트 김 관련 내용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일단 사실을 알아본 뒤 다시 연락을 주기로 하고 헤어졌다. 도대체 로버트 김이 뭘 잘못했으며, 미 해군 비밀서류가 어떤 것들이고, 또 이것들을 누구에게 넘겼기에 이런 형사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보좌관들에게 조사해 보도록 지시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설명에 따르면 6개월 이상을 계속 CC(폐쇄회로) 카메라로 뒤를 밟은 결과, 로버트 김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비밀서류를 꺼내 불법으로 사본을 만든 뒤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전해준 사실이 포착됐다고 한다. 로버트 김 자신이 국가의 비밀서류 사본을 만들어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이 불법이란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이는 심각한 형사 범죄란 얘기였다.

공교롭게도 로버트 김이 넘긴 자료들은 특급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동맹국인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미국 정부에 요청했더라면 사본을 만들어 커버까지 만들어 줬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깝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결국 비밀서류 자체는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로버트 김이 법을 어긴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로버트 김 자신에 대해 조사해 보니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 장로이며,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의 부인 역시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에서, 또 교포사회에서 존경 받는 분이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더 안타까웠다.

도대체 왜 이런 엄청난 실수를 했으며 이 서류들을 누구에게 주었는지 알고 나서는 또 한번 놀랬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류들은 매번 몽땅 워싱턴주재 한국대사관에 무관으로 나와 있는 해군 대령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아니 이런 이급 비밀서류라면 동맹국인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만한 자리에 있는 분이 왜 순진한 로버트 김을 꾀어내 이런 어마어마한 죄를 범하게 했는지 그 대령이 괘씸했다.

좀더 알아본 결과 그 해군 대령은 로버트 김과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비밀서류 사본들을 자기에게 넘겨주면 대한민국 정부가 로버트 김에게 차관급 자리를 줄 수 있다는 약속을 했다는 내용도 전해 듣게 됐다. 그래서 이 것이 사실인지 대사관에 알아보려 했지만 그 해군 대령은 이미 한국으로 소환되어 떠났고,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대령이 무척 서운했다. 미국에 무관으로 파견돼 겨우 한다는 게 순진한 교포를 시켜 몰래 국가 비밀서류를 빼내는 이따위 일이었다니… 게다가 억울하게 그를 감옥에 보내 놓고 자신은 훌쩍 본국으로 도주했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사안을 조사해서 진상을 밝혀내야 겠다고 다짐했다.

비장한 결심을 갖고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깅리치 의장은 내게 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건이 이미 사법부에 넘어갔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이다. 이미 검찰이 기소해 사법부로 넘어간 경우에는 절대 입법부 소속 의원이 사법부에 간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돌아 나오면서 내 마음은 무척 언짢았다. 이튿날 로버트 김의 동생인 한국 국회의원에게 도와줄 길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생각할수록 그 대령이 원망스러웠다. 이 기회에 다시는 순진한 교포를 차관을 시켜준다는 감언이설 등으로 꾀어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국 정부가 해외공관에 특명을 내리도록 부탁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무거운 심경을 달랬다.

얼마 뒤 아마도 1년 정도 실형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로버트 김에게 8년 형이 선고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너무도 놀랬다. 특급비밀도 아닌 것을, 적국도 아닌 우방국에 사본을 넘겨 준 것에 대해 이처럼 가혹한 판결이 내려지다니 뜻밖이었다. 그 분의 나이가 60세가 훨씬 넘었는데 8년을 복역하고 나면 70세를 넘을 테고, 그 동안 연방 정부에서 일한 데 따른 혜택도 없어지고 복역이 끝난 뒤에는 전과자로 그 생활이 비참해질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불쌍했다.

이렇게 법이 엄하지 않으면 이 큰 땅 덩어리에 수십 종의 인종들이 섞여 사는 미국사회를 질서 있게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무거웠다.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문뜩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미국은 천국 같은 지옥이고, 한국은 지옥 같은 천국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하긴 그렇다. 정치적으로 보면, 감옥에 들락날락하고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심지어 사기죄로 감옥살이를 하고도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될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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